소가 '재산목록 1호'였던 시절, 농민들은 소 한 마리를 마련하려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소값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농사를 제대로 지으려면 소는 필요했다. 그래서 방법들을 개발해냈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계'를 조직하는 것이다. 마을 농민들이 모여서 일정한 기간동안 곗돈을 불입, 목돈을 만들어 정해진 순서대로 소를 구입했다. '소계(牛契)'였다. 한 푼 두 푼씩 돈을 불입해서 나중에 커다란 소를 마련했으니 일종의 '재테크'였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이 '소계'가 성행했었다.
재산이 좀 있는 사람의 송아지를 맡아서 대신 키워주는 방법도 있었다. 이를테면 '위탁 사육'이다. 송아지를 키워주는 대신 자라서 어미 소가 된 후 새끼를 낳으면 한 마리 얻는 조건이었다. 그럴 경우, 농민들은 곗돈 부담 없이 소를 마련할 수 있었다.
송아지 '위탁 사육'은 좋은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우선, 송아지의 노동력을 농사짓는 데 이용할 수 있었다. 또한 배설물을 거름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여기에다 나중에 새끼 한 마리를 얻을 수 있으니 키우기는 힘들었지만 그럭저럭 짭짤한 '사업'이 아닐 수 없었다.
소를 길러달라고 맡기는 사람 역시 이익을 봤다. 힘들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소 한 마리가 두 마리가 되는 등 '재산'이 저절로 불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로에게 이익이었다.
하지만 송아지가 '위탁 사육' 과정에서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아까운 송아지를 죽여놓으면 재산상 손해가 적지 않은 것이다. 이에 따라 소를 잘 키운다고 소문난 농민에게만 '위탁 사육'을 의뢰했다. 말하자면 소를 잘 키우는 '전문가'에게 사육을 맡기고, 그 대가로 송아지라는 '스톡옵션'을 내줬던 것이다.
혼자서 소를 사기에는 벅찬 농민들이 돈을 모아 공동으로 구입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펀드'나 '투자조합' 같은 것을 결성한 것이다. 농민들은 공동 구입한 소로 농사도 번갈아 짓고, 종우(種牛)를 삼아 씨받이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번식시켰다.
다른 사람의 종우를 빌려서 씨받이를 하려면 당연히 '씨받이값'을 치러야 했다. '펀드'를 만들어 소를 공동으로 구입하면 그런 돈을 지출할 필요가 없었다. 그만큼의 돈을 절약해서 쌓이면, 소를 또 한 마리 구입할 수 있었다. '펀드'를 불려나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색다른 '소계'가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보도에 따르면, 소비자들이 품질 좋은 한우 고기를 보다 값싸게 먹기 위해 '한우계'를 조직하고 있다고 한다. 소비자들 여럿이 모여서 계를 조직, 매달 몇 만 원씩 곗돈을 적립해 한우 한 마리 값을 모으는 것이다. 그런 다음, '믿을 만한' 한우 한 마리를 통째로 사들여 부위별로 골고루 갈라먹는 계다. '재테크'가 아닌 '식(食)테크'를 위한 계인 셈이다.
송아지를 대신 키워주는 '위탁 사육'도 생기고 있다고 한다. 소비자들이 영농조합 같은 곳에 송아지를 맡기고 가장 안전한 사료만 골라서 먹여 맛좋은 한우로 키워달라는 '위탁 사육'이다. 옛날처럼 송아지를 스톡옵션으로 얻기 위한 '위탁 사육'이 아니라, 품질 좋은 '유기농 한우'를 아예 송아지 때부터 키워서 잡아먹자는 것이다. 기발한 '식테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터넷 쇼핑몰 등에도 '콩 먹인 한우', '감 먹는 한우' 등이 넘치고 있고, 한우 한 마리를 통째로 구입하려는 소비자들의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고 한다. 주로 아파트나, 교회 등이 한우를 공동 구입하고 있다는 보도다.
'소계'는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에 성행했었다. 그랬던 '소계'가 먹고살 만해진 오늘날 다시 각광받고 있다. '미친 소'에 대한 불안감이 세월을 거꾸로 돌리고 있는 것일까.
김영인 기자 (csnews@cs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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