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임금은 창경궁 동쪽 담에 월근문(月覲門)을 만들었다. 부친인 사도세자를 모시는 경모궁(敬慕宮)과 통하는 문이다. 경모궁은 원래 사도세자가 죽은 후 영조 임금이 만든 수은묘(垂恩廟)였다. 이를 정조가 경모궁으로 고친 것이다.
정조는 그 경모궁 안에 자신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사도세자의 사당을 항상 바라보도록 했다. 그것으로는 부족해서 아예 문을 만들고 수시로 참배하러 다닌 것이다. 정조는 효자였다.
정조의 그런 효심을 이용해먹으려는 듯한 사건이 있었다. 강명길(康命吉)이라는 임금의 '주치의'가 서대문 밖에 있는 산을 사들인 것이다. 조상의 묘지를 이장하겠다는 명분이었다. 강명길은 그러면서 산 아래에 있는 '부동산'에 눈독을 들였다. 민가 수십 채까지 한꺼번에 사들였다.
민가를 샀으니 살고 있는 주민들을 몰아내야 했다. 무턱대고 몰아낼 수는 없었다.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집을 비우라고 통고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집을 비워줄 수 없었다. 추수는 끝냈지만, 흉년으로 농사를 망쳤기 때문이다. 억지로 집을 비워주면 굶어죽을 처지였다. 생계가 막연했던 것이다.
'끗발' 좋은 강명길은 주민들의 딱한 사정을 외면했다. 대뜸 한성판윤 권엄(權엄)에게 고소장을 제출했다. 계약을 위반한 주민들을 내쫓아달라고 요청했다. 한성판윤은 오늘날의 서울시장이다.
그렇지만 권엄은 고소를 들어주지 않았다. 주민들의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을 바짝 받은 강명길은 정조에게 고자질을 했다.
정조는 강명길의 고자질을 그대로 믿었다. 강명길의 '묘지 이장'이 효심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승지 이익운(李益運)을 보내 한성판윤을 설득, 주민들을 몰아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의기양양해진 강명길은 다시 고소장을 내밀었다. "임금이 나를 밀어주는데 한성판윤 따위가 어떻게 할 것인가." 권엄은 그래도 요지부동이었다. 여전히 고소를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결국 정조가 '뿔'을 냈다. 승지 이익운을 불러 호통을 쳤다. 효자가 묘지를 옮기겠다는 것을 한성판윤이 들어주지 않는다며 혼을 내라고 했다.
권엄은 그런데도 말을 듣지 않았다. "추위에 떠는 백성을 몰아내면 길에서 얼어죽을 것이다. 내가 죄를 지을지언정, 백성이 나라를 원망하도록 할 수는 없다"며 끝내 버텼다.
주위의 사람들이 걱정을 해줬다. 임금의 명령마저 거부하는 권엄에게 고집을 꺾으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권엄은 목이 달아나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정조가 생각해보니 권엄의 처사가 옳았던 것이다. "얻기 어려운 인재다. 승지 같았으면 한성판윤처럼 할 수 없었을 것이다"면서 강명길의 고소 사건을 없었던 일로 하라고 지시했다. 정조는 어진 임금이었다.
지금 서울시장은 굉장한 일을 하고 있다. 이른바 '한강 르네상스'다. 한강에 인공 섬을 만들고, '낙하 분수'를 설치한다. '수상 관광택시'가 강물 위를 달린다. 전망대도 세운다. 서울은 '워터 프론트 도시'로 탈바꿈한다. 곳곳에 공원이 들어선다. 서울 전체가 아름다운 공원처럼 된다. 온갖 축제도 열리고 있다. 아마도 대단한 '치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김밥 할머니'는 그 '아름다운 서울'을 즐길 여유가 없다. 오히려 매를 맞고 있다. 그것도 손자뻘인 20대 청년에게 매를 맞고 있다. 청년은 김밥이 담긴 대야를 발로 차서 엎어버리기도 했다.
'호떡 할머니'는 폭행을 당해 두 달이 넘도록 팔에 깁스를 하고 있다고 한다. 먹고살기도 힘드는데 벌금까지 물 처지다. 할머니들은 이제 '눈물의 김밥'과 '한 맺힌 호떡'을 팔게 생겼다.
할머니들이 매를 맞은 이유는 노점상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서울'을 꾸미는데 노점상은 걸림돌일 수밖에 없다. 노점상이 사라져야 '관광 서울'도 빛날 수 있다.
한성판윤 권엄이 지금도 서울시장을 맡고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름다운 서울'보다는 '노점상 살리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김영인 기자 (csnews@cs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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