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 소문내기

전라도 맛_ 붕어찜

올소맨 2008. 3. 18. 22:24

전라도가 맛있다

-남도음식의 블루오션을 찾아라

<9>노사 기정진 종가의 붕어찜

 
전라도가 맛있다-남도음식의 블루오션을 찾아라<9>노사 기정진 종가의 붕어찜

만물의 근원(根源)이라 일컬어 지는 강(江). 메소포타미아·이집트·황하·인더스 등 세계 4대 문명이 모두 큰강을 끼고 태동한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태초부터 끊임없이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어머니'의 품처럼 때론 포근하고 다정하게, 때론 현대인들의 어리석음을 근엄한 질타로 깨우쳐 주기도 한다.

장성 황룡강(黃龍江). '황룡면과 황룡동, 황룡마을, 복룡동(伏龍洞)…'.

이처럼 황룡강에서 유래한 지명이 현재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을 정도로 인근 지역과 주민들에게 미친 영향은 대단했으리라.

장마 뒤끝. 간간히 '장맛비'가 흩뿌리던 지난 24일.

'長安萬目 不如長城一目(서울의 수많은 눈이 장성의 눈 하나만 못하다)'.

한말(韓末) 청나라 사신들과 조정 대신들을 감탄케 한 유명한 일화를 남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 선생의 숨결과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장성군 진원면 진원리 고산서원(高山書院)을 찾았다.

선생의 6대 종손으로 서예연구원을 운영중인 기호중(70·광주시 남구 백운1동)옹이 바쁜 와중에도 '글을 쓰는 문인들이 왔다'며 취재팀을 반갑게 맞아준다.

기 옹의 안내로 '산앙문' 동문을 통해 고산서원에 들어서자, 노사 선생이 후학들을 위해 학문을 강론했던 담대헌(澹對軒)이 세월의 모진 풍파를 뒤로 한 채 '강직'하고 '꿋꿋'하게 서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난한 삶도 달게 여기며 40여차례나 벼슬에 나갈 수 있었으나,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몰두했던 선생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자연스레 옷깃이 여며진다.



조선시대 6대 철학자 중의 한명인 노사 선생의 문집과 신도비문 등이 보관돼 있는 '장서각'. 선생의 서적과 생활 용품 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장판각', 동재인 '거경재' 서재인 '집의재' 등등.

현재 1주일에 1∼2번 꼴로 서원을 찾는다는 기 옹과 종부(宗婦) 박정자(68) 할머니.

서원 전체 경내를 지키며, 사실상 종택(宗宅) 역할을 하고 있는 고직사(庫直舍)에서 노사 선생 종가의 내림 음식을 맛봤다.

종가에서 손님상에 주로 올리는 음식은 붕어찜과 북어 양념구이, 청국장, 집장, 죽순나물, 불미나리 무침, 현미로 만든 인절미와 조청 등으로, 대부분 텃밭에서 가꾼 야채와 채소를 사용한다.

특히 종가의 대표적 내림 음식인 붕어찜에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중의 한명 이었던 선생의 '검소하고 강직한' 성품이 잘 드러나있다.

육고기를 멀리하고, 나물과 채소 위주의 담백한 음식을 즐겼던 선생은 옛날 황룡강에서 잡았던 붕어와 마당 한켠에 있는 가죽나무의 말린 잎, 무 등을 넣고 푹 끊여서 만든 붕어찜을 즐겼다고 한다.

이처럼 주변 논·밭과 텃밭, 황룡강 등 자연에서 나온 무공해 제철 음식을 즐겼던 노사 선생의 입맛과 가풍은 현재 후손들에게까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때문에 노사 선생 종가 음식의 핵심 키워드를 '자연 그대로의 음식'이라 불러도 무방할 듯 싶다.

종부인 박정자 할머니는 "집안 내림 음식 자체가 아주 담백하다"면서 "가풍에 녹아있는 선비 정신 탓인지, 육고기를 먹더라도 볶거나 구워서는 잘 안먹으며, 주로 채소와 나물을 즐겨 먹는다"고 말했다.

기획취재팀 blog.naver.com/mdfood1

박정자 할머니


노사 기정진 종가

6대 종부 박정자 할머니

노사 기정진 종가의 6대 종부(宗婦) 박정자(68) 할머니. 넉넉하고 마음씨 좋은 여느 시골집 할머니 같다. 장성이 고향이었던 박 할머니는 스물 한살에 중매를 통해 만난 현 종손과 결혼했다.

"막 시집왔을 때, 시부모님, 시할아버지, 시할머니 모두 살아 계셨죠. 가난한 선비 집안의 종갓집으로 들어와 참 힘들었어요. 그런데 남편은 조금 있다가 바로 군에 입대해 버리데요."

종가에서는 현재 1년 제사만 13번에, 봄·가을 등 매년 2번씩 열리는 서원 제사까지 합치면 모두 15번의 제를 올리고 있다.

그는 "제사 모시는 것이 이제는 신앙 같아요. 마음이 편해지고, 조상님들을 잘 모셔서 그런지, 우리 아이들이 모두 잘커서 너무 좋다"면서도 "종부는 항상 긴장되고, 짐이 무거운 자리라, 방심하면 제사나 생일을 넘겨버리는 등 문제가 생길 수가 있어 여행은 엄두도 못내고, 밖에서 따로 잠을 자본 기억도 없다"고 말했다.

이어 "붕어찜은 물론 청주와 집장, 엿 등 집안 음식 하나하나가 손이 많이 가는 만큼 만들기가 쉽지 않다"면서 "시어머니에게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울 때 '잘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며 멋쩍게 웃는다.

이제 '종심(從心)'을 바라보고 있는 박 할머니는 현재 담백한 맛을 지닌 집안의 내림 음식의 대를 잇고, 며느리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종가 음식을 모두 매뉴얼화 하는 작업에 나설 계획이라고 한다.

지난해 큰 수술을 받기도 했던 박 할머니는 "종가로 시집와서 힘은 들었지만, 보람도 많이 느꼈다"면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와 집안 음식 만드는 방법 등을 책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지현의 명가음식 엿보기-전라도 음식의 산업화.세계화 제언

청정한 식재료 상품화

음식을 먹는 것은 그 재료가 갖는 기운을 먹는 것이다.

나라를 구하고 바른 뜻을 세운 선비들이 먹던 음식은 서원 뒷산 대나무밭에서 캐온 죽순으로 만든 죽순초무침, 마당에 곧게 자란 참가죽나무에서 베어낸 어린 가죽나무잎을 말려 만든 부각, 마을 앞 황룡강에서 잡은 붕어와 말린 가죽 잎으로 오랫동안 조려 만든 붕어찜, 종부가 직접 담은 청주, 집장과 조청, 깻잎장아찌, 현미와 제비쑥을 넣은 인절미, 청국장, 땅에 묻어 놓은 묵은지, 호박잎찜, 제를 올리기 위해 서원을 찾는 유림들을 위한 북어찜 등이었다.

원래 노사 선생댁 사람들은 육식을 즐겨하지 않아 반찬에 고기는 거의 없으며, 양지머리로 육수를 내어 고기는 넣지 않고 그 국물로만 국을 끓였다. 개운한 채소 등을 즐겨먹고 소식을 하였다. 가난을 극복하면서 학문하는 자세나, 평소생활 속에서 보여준 절의와 정미하고 심오한 사상적 조예를 바로 노사 선생 집안의 음식에서도 엿 볼 수 있었다. 조상의 살아온 방식을 전수하며 조상의 음식을 먹고 느끼며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명가들을 방문하면서 회를 거듭 할수록, 처음에 음식만을 바라보며 느꼈던 떨리는 감동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전라도 음식을 산업화하고자 특이한 조리법이나 희귀한 음식을 찾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었으며, 지금 내 주변에 널려있는 식품들이 바로 소중한 전라도의 유산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명가음식을 상품화하기 위해 우리 주변에 널린 청정한 자연에서 나온 전통 식재료를 상품화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 후에 비로소 음식이 생산될 수 있는 것이다. 아토피가 심하고, 소아비만으로 씨름하는 우리의 식생활에서 가족의 건강을 책임져야 하는 주부들은 생활의 편리함을 쫓아 집 앞 가게에서 구입한 인스턴트식품으로 우리 가족의 밥상을 차리려 하고 있다. 가죽나무잎, 죽순, 참붕어를 손쉽게 구할 수 있도록 보급해야 하고, 소비자들이 만족할 수 있는 가격에 접근해야 한다. '평범이 비범이다'는 진리를 되새겨 본다.광주여대 식품영양학과 겸임교수

이치를 통달한 노사 기정진선생

장성 고산서원은 노사 기정진 선생을 주벽으로 모신 사우이자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서당이다.

행주기씨인 기정진 선생은 조선 1798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장성에서 살았다.

일곱 살에 이치를 터득하고, 10살에 경서와 사서를 통독하고 사마시 장원으로 입격하였다. 병인양요 때 위정척사 소를 올려 그 소가 높이 평가되어 동지돈녕부사라는 벼슬을 내렸으나 임하지 않았다. 40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전설사 별제로 백면서생을 면한 뒤 낙향하여 고산서원 터를 잡아 담대헌(澹對軒)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다 1879년 일기를 마치신 분이다.

조선말 '장안 만인의 눈이 장성의 눈 하나만 못하다'라는 일화의 주인공.

조선의 상주국 중국에서 '용단호장(龍短虎長)'이라는 문제가 내려졌다.

조정대신들은 물론 유명한 학자들이 모두 풀지 못하자 왕과 신하들의 걱정이 태산 같았다.

문제를 풀지 못하면 나라 체통도 체통이지만 벌칙이 따랐다.

서울 장안에서 풀지 못한 문제를 장성의 노사선생이 '용단호장'이란 화원서방(畵圓書方)이라 풀었다.

'그림으로는 둥글고, 글씨로는 모가 난다'며 고기에 비유했다. 동해에 고기가 있는데 무두무미(無頭無尾)요, 우무척골(又無尺骨)이라. 고기 어(魚)자 머리 획과 아래 네 점을 떼면 밭 전(田)자다. 전(田)자에 또 내리긋는 획을 없애면 날 일(日)자 즉 해다. 왜 해인가.


해가 진(辰: 용)방에서 떠 진(辰)방으로 지는 겨울 해는 짧고, 해가 인(寅: 범)방에서 떠 인(寅)방으로 지는 여름 해는 길어 용은 길어도 겨울 해는 짧고, 범은 짧아도 여름 해는 길다는 뜻이다.

선생은 특히 300여년 이기(理氣)의 논쟁을 마무리해 영남 제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500여년 벽을 허물었을 뿐 아니라, 100년 안에 임금 자리를 신하가 빼앗고, 지아비 위치를 지어미가 빼앗고, 이치의 순리를 오기가 빼앗을 것이라 했다.

고산서원은 불태산 서편 자락 학전봉 아래 반월과 눈썹달 사이에 있다. 동 안마산과 서 학전봉이 감싸며 무등산이 보이는 곳이다.

진원은 옛 구사오단국인 곳이다. 전호 필암서원 강당이 바로 진원현의 동헌건물이다.

담대헌 앞뜰에 화류목(花柳木)은 노사선생이 말채찍을 하였다 심은 꽃버들인데 회초리로 그지없이 좋아 그 의미가 깊다. 그리고 학들이 노니는 봉우리 아래여서 우연한 이름이 아닌 듯싶다. 김용휴 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