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가 맛있다 -남도음식의 블루오션을 찾아라- 8.울산 김씨 종가의 청주와 집장
취기가 절로 <8>울산 김씨 종가의 청주와 집장 '청산(靑山)도 절로절로 녹수(綠水)도 절로절로 산도 절로 물도 절로 하니, 산수 간 나도 절로 아마도 절로 생긴 인생이라, 절로절로 늙사오리.' (하서 김인후 선생이 지은 한시로 '하서집'에 실렸다) 절로 생긴 인생이라지만 우여곡절이 많아 자꾸 보대끼는 삶을 절로절로 굴러가게 해주는 데 청주만한 것이 있을까. 자연 속에서 자연대로 살고 늙는, 모든 것을 대자연에 내맡긴 옛 풍류객을 더 호탕하고 멋드러지게 만들어준 것 또한 '청주'였지 않았을까.
청주는 제사때 신령에게 바쳐서 인간사의 평안을 비는데 쓰였다. 한편으론 윗사람을 공경하는데도 빠지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특히 발달했던 가양주는 집집마다 제사에 쓰일 술들을 나름대로 솜씨로 만들었고 집의 안주인은 손님이 오면 언제나 가문을 대표하는 청주를 주안상에 올렸다. 가장 맑은 첫 술은 주로 제사에 올렸다. 술을 즐겼던 김인후 선생 장맛비가 심술을 부리지 못해 안달이던 지난 6일, 유난히도 술을 즐겼던 조상 덕(?)에 아직도 1년중 8개월 가량은 청주를 빚고 집장을 만든다는 장성군 황룡면 필암서원의 하서 김인후 선생 후손을 찾았다. 필암서원의 입구인 '확연루'를 지나 수업을 받는 '청절당'에 들어서자 선비학당 강사인 박래호씨와 16대 종부인 윤종숙(72)씨가 취재진을 맞았다. 필암서원은 사적으로 지정된데다 15년전부터는 하서 선생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어서인지 고즈넉하면서 대학자였던 김인후 선생의 후덕한 인품을 그대로 풍기고 있었다. 김인후 선생이야 영남에 이황이 있다면 호남에는 김인후 선생이 있다고 할만큼 학덕이 크고 넓은 학자다. 그런 김인후 선생은 조선 명종때,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홍문관교리로 부름을 받고 술 여러 말을 지고 길을 떠났다가 술이 떨어지자 집으로 되돌아와 버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을 만큼 술을 가까이 했다. 그래서일까. 그런 할아버지를 섬기는 윤종숙씨는 청주 만드는 데 만큼은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청주를 내릴때는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주변에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할 만큼 온 신경을 기울인다. 제사 4개월전에 누룩 띄워 1년에 음력 2월과 8월 두차례 김인후 선생을 기리는 춘향제와 추향제가 열리는 데 이 때 사용할 청주는 4개월전부터, 집장은 보름전부터 만들기 시작한다.
취재진이 필암서원을 방문한 때가 춘향제와 추향제의 중간쯤 되는 철이라 청주나 집장 만드는 과정은 볼 수 없었고 청주를 빚기 위해 만들어 놓은 누룩이 전부였다. 윤씨는 제사 3개월전에 쌀 80㎏분량의 누룩을 만든다. 발효과정에서 혹시나 변질될까봐 날마다 뒤집고 손질한다. 이 누룩을 빻아서 보관했다가 찐 쌀과 섞어 술을 앉힌다. 3일간 불을 피우고 지켜본 뒤 불을 끄고 온도를 맞춰간다. 정성이 부족하면 제대로 빚을 수 없다. 맛은 물과 누룩과 술익는 온도가 좌우한다. 필암서원의 청주는 다른 곳보다 도수가 높다. 그것은 술을 내릴 때 물을 적게 붓기 때문이다. 된장도 고추장도 아닌 것이… 집장은 정확히 어떤 연유로 발달했는지는 알수 없으나 필암서원에서만 만들어 먹다가 점점 인근 동네로 퍼져나갔다고 했다. 집장은 된장도 아닌 것이 고추장도 아닌 것이 맵사하면서도 곰삭아 입맛을 돋구는데는 그만이다. 쌀과 밀, 메주콩을 삶아 띄우고 말려서 가루로 만들었다가 찹쌀로 죽을 쒀 만드는 과정은 여느 집과 비슷하다. 필암서원 집장의 깊으면서 곰삭은 맛은 마지막 숙성과정에서 나온다. 재료를 항아리에 담고 마당에 돌을 쌓은 뒤 '겨'로 불을 지펴 서서히 익힌다. 또 깔끔한 맛을 내기 위해 참기름이나 깨도 넣지 않는다. 윤씨는 "요즘은 전기밥통에 많이들 앉히는데 그러면 제대로 된 집장의 맛이 나질 않는다"고 말했다.기획취재팀 blog.naver.com/mdfood1
인터뷰 "음식 정성껏 만드는 일이 내 업" "할아버지(김인후 선생) 모시면서 정성껏 음식 만드는 일이 내 업이라고 생각하고 삽니다." 윤정숙(72)씨가 필암서원에 들어온 것은 15년전이다. 필암서원 관리를 다른 이들에게 맡겨왔던 울산 김씨 종친들이 김인후 선생 16대손인 김병삼(82)씨에게 권유하면서 안살림은 자연스레 윤씨 몫이 됐다. 1년에 음력 2월과 8월 두차례 큰 제사가 돌아오면 찾아오는 종친 300∼400명을 접대하기 위해 청주를 빚고 집장을 만든다. 청주 빚는게 힘들텐데 주조장에서 사면 되지 않냐는 물음에 "올 봄 몸이 아퍼 수술하는 바람에 청주를 빚지 못해 인근 주조장에서 구해다 대접했는데 종친들이 맛이 없다고 갸우뚱하시는 거예요."라는 윤씨의 답변이 돌아왔다. 남들처럼 '대물림'이라거나 '전통음식 보존'이라는 거창한 명분보다 윤씨에겐 종친들의 '맛이 다른데…'라는 그 한마디가 청주를 빚는 이유다. 필암서원만의 비법도 그저 '정성'이다. 누룩을 띄울때도 행여나 잘못될까 안절부절하다가 술을 내릴 때는 그 정성이 극에 달한다. 목욕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마음을 졸이며 술이 되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윤씨는 "혹시나 부정탈까봐 손도 못대고 다른 사람은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해요"라고 말했다. 요즘이야 가까운 편의점에서 쉽게 사서 마시는 탓에 멋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우리 조상들은 까다로운 과정을 참아가며 도 닦는 마음으로 술을 내렸다. 오죽했으면 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빚는다고 했을까. 요즘 윤씨 걱정은 이 곳을 관리할 후손에 대한 걱정이다. 둘째 아들이 필암서원을 관리하겠다고 자청했지만 젊은 아들이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한 채 '후손의 도리'로서만 이곳에 머문다는 게 썩 마음편치는 않다. 윤씨는 "필암서원은 울산 김씨의 조상을 모시는 곳이기에 앞서 이 지역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라며 "그런 곳의 관리를 '종친의 도리'쯤으로만 여기며 신경쓰지 않는 지자체가 조금 서운하다"고 밝혔다.
김지현의 명가음식 엿보기-전라도 음식의 산업화.세계화 제언 멋과 흥이 담긴 청주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 ‘주자가례’의 영향을 받아 중앙집권이 약화되고 향토세력이 강화되면서, 호족들은 향교를 만들고 시제를 공동으로 지내게 되었다. 시제에는 집안의 특별한 음식과 정성껏 담은 제주를 올리므로 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가양주란 ‘전통의 술빚기 그대로 집에서 담궈 마시는 술’로서, 시제를 지내기 위해 정성껏 빚은 술로 조상께 예를 올리며,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술이다. 가양주 담그는 법은 누룩(밀가루)을 쌀과 같이 발효시켜 용수를 박아 청주를 걸러내고, 남은 찌꺼기로는 탁주(막걸리)를 만들고, 청주를 소주고리에 넣고 끓여 받아낸 것이 소주이다. 가양주에 국화 진달래 등을 넣어 향을 첨가시켜 가향주를 만든다. 우리가 흔히 쓰는 정종은 일본말이므로 청주라 불러야 옳은 표현이다. 서양의 스파클링 와인(샴페인)은 포도에 설탕과 이스트를 넣어 발효시키며 이를 증류시킨 것이 꼬냑이고, 보리, 수수 등을 이용하여 만드는 위스키, 럼주 등 세계 각국에는 그 나라만의 다양한 술이 있다. 필암서원의 청주는 장성에서 나오는 쌀을 이용하여 정성으로 빚어 진한 맛이 베어 있었고, 알콜함량은 30도 정도로 1년을 두어도 썩지 않는단다. 필암서원의 시제상에는 청주외에 모든 것을 생것으로 올리는데, 돼지머리, 꼬리달린 뒷다리, 석작에 담은 쌀, 모조, 참장어를 말린 포, 껍질째 올리는 밤, 은행, 조기, 사슴고기로 만든 녹회, 뿌리가 달린 알타리무 등을 놓는 것이 다른 종가의 시제음식과는 특이한 점이 많았다. 서원에서는 방학을 맞아 대학생들에게 유교전통에 따른 한학강좌를 실시하고 있었다. 21세기 음식의 키워드는 유기농과 수제품이다. 장성에서 나는 유기농 쌀과 정성들여 손으로 빚은 술밥, 진한 맛이 베어 있는 청주는 필암서원에서 밖에 맛볼 수 없는 고유의 맛과 멋이다. 술에는 인생의 맛과 멋 그리고 흥이 있다. 역사문화유산인 서원에서 전통교육과 함께 학생들 손으로 직접 술 담그기를 한다면, 삶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주류문화, 다음세대를 위한 술 문화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이다. 지방화시대에 맞춰 지역사회에 남아 있는 조상들의 역사문화유산과 친근한 만남을 통해 지역의 활성화를 가져와야 한다. 지역전통에 기반을 두는 문화관광상품 개발을 통해서 전통의 창출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광주여대 식품영양학과 겸임교수 김용휴의 맛과 멋 대같이 곧은 선비 '하서' 장성 황룡면 필암서원은 호남유림들이 김인후선생을 기려 지은 사우다. 김인후 선생을 간략하게 클릭해보니 자 厚之, 호 河西. 울산김씨 참봉 김령의 아들. 조선조 서기1510년 장성 맥동에서 태어나 1560년까지 살았던 문신이요 문장이다. 시호는 文正이다. 문묘배향 18위중 한 분의 유현(儒賢)이다. 세자 '인종'의 스승이다. 인종이 세자 당시 선생을 따랐을 뿐 아니라 주자대전 한질과 묵죽을 쳐 드리자 ‘뿌리 가지 마디 잎새 모두 정미롭고 굳은돌은 벗인 양 주위에 둘러있네/성스런 님 조화를 짝하시니 천지랑 함께 뭉쳐 어김이 없으셔라’라고 적은 화답시와 묵죽도가 판각되어 경장각에 있다. 인종이 승하하자 선생은 더 이상 벼슬을 하지 않고 낙향, 성경(誠敬)을 행하며 후학을 가르치면서 시문을 지었다. 필암서원은 어떤 곳인가. 서원 앞 실개천은 서출(西出) 동류(東流)하고, 동구(洞口)의 냇물은 황룡강에 합류하고 뒤 성경산(誠敬山·유민산)의 남쪽 자락이 내리뻗어 동으로 살짝 구부리는 산등에 솟은 바위들이 마치 꽃봉오리 같은 문장주의 정남으로 잡은 터다. 산이란 형상이 뚜렷하면 이름이 있다. 이름 또한 심안으로 명명된 誠敬山 문장주-. 서원 오른편 추산이 백호, 왼편 기산이 청룡을 이룬 앞으로 황룡강이 흐르는 건너 선인이 춤추듯 솟아오르는 연지봉에 흰 구름 감도는 안통 넓은 흘리들에 연하가 드리운 곳이다. 필암서원을 들어가 보자. 실개천 건너 홍살문이다. 문루인 곽연루의 동문 서문은 고개를 수그려야 드나들 수 있는 위는 널따란 누대다. 곽연루를 지나 청절당 강당이다. 마침 노강선생이 선비학당 강학준비를 하다 취재팀을 맞는다. 동 진덕재, 서 숭의재 맞은편 영당이다. 영당문 앞 좌 필암서원비 우 경장각, 부속사들이 동서로 즐비하다. 서원은 선생 사후 1590년 호남유림들이 기산리에 지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1624년 다시 짓고, 1662년 유생들의 소청으로 필암서원이라 사액되었다 1672년 이 터로 옮겼다. 청절당은 진원현 객사를 맞춘 건물이다. 서원 명은 선생이 태어난 맥동 동구에 붓 바위가 있어 붓筆에 바위巖자로 명명한 이곳은 보물 제587호 필암서원 문서일괄과 사적 제242호로 지정된 곳이다. 선생이 시를 짓고 찾아온 이들의 답례주로 즐겨 내놓으셨다는 청주의 연원 그 청주 맛-, 카랑카랑타.김용휴(향토사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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