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다음과 같은 글이 한 신문에 실렸다.
"오는 7월1일은 우리나라 노인에게 역사적인 날로 기억될 것이다. 대한민국에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이 제정되어 전 국민에게 본격적으로 실시되는 국민효도보험시대가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가족 수발에서 전문 요원의 도움까지 가족과 사회가 공동으로 수발(장기요양)을 담당하게 된다.…"
노인을 더욱 깍듯하게 모시게 될 것이라는 기사였다. 우리는 노인을 공경하고 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동방예의지국'이었다. 고을의 사또는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곤 했다. 이를 '양로례(養老禮)'라고 했다.
사또뿐 아니라 나라의 임금도 그랬다. 해마다 가을이 끝날 때쯤 되면 80세 이상의 할아버지들을 불러 '어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왕비는 80세 이상의 할머니들을 불러 '궁중'에서 별도로 잔치를 열었다. 이 노인을 모시는 전통이 국민효도보험으로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양로례'라는 것의 절차를 보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어딘가 희한했다.
1) 노인들을 나이 순서대로 천막 아래 마련된 자리 앞에 <세운다>.
2) 사또가 들어와 노인들에게 인사를 하면 노인들도 답례를 한다.
3) 사또가 <먼저 자리에 앉으면> 노인들도 앉는다.
4) 잔칫상을 차리고 사또가 각 상을 돌아다니며 자상하게 살펴본다.
5) 사또가 주는 술잔을 노인들이 받아 음식상 위에 올려놓는다.
6) 노인 한 사람이 <사또에게 술잔을 권한다>.
7) 사또가 술잔을 비우면 노인들도 일제히 마신다.
8) 마시는 순간에 풍악이 울려 퍼진다.
마치 오늘날의 '경로잔치'였다. 높은 나으리나 정치 지도자가 연말이나 명절 때 경로잔치에 참석하는 것과 비슷했다.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폼'을 있는 대로 잡아가며 노인들을 초청해 생색을 내는 것이다.
노인들은 높은 나으리 앞에서 시키는 대로 포즈를 취해야 했다. 나으리가 먼저 자리에 앉아야 앉을 수 있었다. 나으리가 술잔을 비운 다음에야 따라서 비울 수 있었다. 오로지 감지덕지해야 했다. 양로례는 어쩌면 전형적인 '전시용 행사'였다.
노인들을 모신다고 하면서도 별로 그렇지 못하는 사례가 농촌에서 나타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2005년 기준 우리나라의 농가 인구는 343만3,753명이다. 전체 인구의 7.1%다.
그 농가 인구 가운데 60대 이상의 고령층이 135만1,053명이다. 농가 인구의 39.3%에 달하고 있다. 이 고령층의 늙은이들이 뼈가 닳도록 농사를 지어서 젊은이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힘들고, 돈도 몇 푼 벌지 못하는 농사를 젊은이들이 기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늙은이들 덕분에 그나마 쌀이라도 자급하고 있다. 오히려 남아돈다며 떠들고 있다. 그래도 전체 곡물 자급률은 형편없다. 28%밖에 안 된다고 한다.
'오일 쇼크'라는 말 대신에 '그레인 쇼크'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다. '애그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기고 있다. 먹을거리 값이 한없이 오르고 있다. 라면 한 봉지 값이 100원이나 올랐다고 대통령이 우려를 표명하는 현실이다.
그 '그레인 쇼크'의 극복도 노인들 몫이다. 농가 인구 가운데 고령층의 비율이 2020년이 되면 62.8%로 껑충 높아지는 것이다. 그 고령층마저 사라지면 '그레인 쇼크'를 외국 농산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면서도 대책은커녕, 늙은이들이나 모여 있는 농촌을 무시하고 있다. 농촌의 표 따위는 얼마 되지도 않기 때문일 것이다. 추곡수매제도를 없애고 농진청을 폐지할 생각이나 하고 있다.
말만큼은 번지르르하다. 급속한 고령화 때문에 2050년이 되면 생산가능인구 1.5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한다는 등의 얘기를 늘어놓고 있다. 아이를 많이 낳아야 된다는 목소리만 높이고 있다. 그 아이가 자라면서 노인들이 농사지은 쌀을 먹을 것이 뻔한데도 말이다.
이정선 기자 (csnews@cs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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