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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것만 지향하는 사회. 주위를 돌아볼 겨를이 없어진 황막함

올소맨 2011. 6. 10. 18:42

 

빠른 것만 지향하는 사회. 주위를 돌아볼 겨를이 없어진 황막함

 

2011.06.10

 

패스트푸드에 대한 느낌이 어떻습니까. '자극적인 것'. '몸에 안좋은 것'. '값이 싼것'. 그래서 슬로푸드에 대한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어느덧 세상은 빠름이 미덕이 되버렸습니다.

 

속도지상주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런데 빠른 속도에는 획일성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빠를 수가 없습니다. 중국집에 가서 음식을 시키더라도 통일하면 빨리 나오지 않습니까. 이러한 획일적이고 고속의 시대에서 자신과 가족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을 신경쓰기는 힘듭니다. 고속으로 달리는 차에서 밖을 내다보면 멀리 있는 것은 분명하게 볼 수 있지만 정작 가까이 있는 것은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보려 했다가는 어지럽고 긴 선으로 스쳐지나칩니다. 

 

자신의 앞에 등장하는 현실도 상당히 버겁습니다. 엄청난 속도를 감당해야하니 옆으로 지나치거나 지나온 것에 대해서 관심을 쏟기에 역부족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고속으로 달리는 자동차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것은 성인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은 물론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서도 발견되는 부분이니 사회 전반의 분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과 달리다 보니 문득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속도를 줄이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발견되면 여지 없이 빵빵거리며 빨리 가라고 재촉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속도를 방해하면 핀잔을 듣게 되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내 앞에 놓여진 길만으로도 버겁습니다. 그렇다보니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습니다. 자신이 달리고 있는 길을 감싸고 있는 환경들은 오로지 앞에 나타난 것만 얼핏 보고 지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속도감에 사람들은 무력해집니다. 잡고 있는 핸들을 놓거나 속도를 줄여 버린다면 자신은 도태가 되버리고 한눈을 팔면 사고가 나서 크게 망가질 것을 염려합니다. 그리고 점점 빨라지는 속도로 인하여 속도감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렇다보니 자신이 살아가는 것에 연관된 것에 순위를 두고 먼 순위부터 무감하게 됩니다. 그것이 사회에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이고 정치이며 이웃의 일들입니다.

 

그러나 주변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고 수많은 변수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엄청난 속도 때문에 인지를 방해하고 획일적으로 뻗어있는 길에서 좀 더 편하고 우월하게 달리는 것에 더 신경이 쓰일 뿐입니다.

 

패스트푸드가 빨리 먹을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그만큼 건강에 좋지 않은 것처럼 무섭도록 속도를 지향하는 사회구조도 역시나 많은 위험요소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속도감에 멀미를 하는 사람들은 루저로 취급되고 속도에 취한 사람들은 난폭해지다 못해 광폭해지고 있습니다. 못견딘 사람 중엔 세상을 등져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살율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속도지향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자신을 제외한 일에 관심을 갖기는 무척 힘듭니다. 그나마 이도 저도 아닌 중도라는 이름으로 사실상의 무관심이나 다를바 없는 사람은 허세나 여유를 부리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깊고 차분히 생각하지 않고 보이는 현상에 대해서 표면적인 것만으로 판단하는 것에서 기인된다고 생각됩니다.

 

사회가 초고속으로 흘러가는 형태에서는 경쟁이라는 요소가 크게 작용합니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다닐 때부터 경쟁을 배운다고 합니다. 속도에 적응하는 과정이 되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 발 앞서 나가면 그만큼 빠른 것이고 빠른 것은 좋은 것이고 훌륭한 것이 되버리고 있으니 깊고 충만함을 배우지를 못합니다. 하물며 그 밖의 사회는 어떻겠습니까. 이런 사회구조가 계속 된다면 사람들은 여전히 이기적이고 자신과 관련된 것 외에는 신경을 안쓸 것입니다. 나무라고 비난한다고 그것을 바꾸기는 역부족일 것입니다. 

 

이제 세상에 부여될 중요한 명제는 회복입니다. 너무나 빠른 속도는 많은 상처를 만들고 있습니다. 사회병리현상도 끊임 없이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인문학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빨라야 할 것은 빨라야 합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모든 것이 빠른 속도를 지향하는 것은 세상을 너무 피폐해지게 만드는 것은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