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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흔들려도 산천은 늘 제자리다.

올소맨 2011. 6. 10. 01:56

 

세상은 흔들려도 산천은 늘 제자리다.


 

80년 5월, 10일에서 18일로 이어지던 그 때, 세상은 금방이라도 깨질 듯 요동쳤다. 거리에 넘쳐나던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요구, 그 소리는 산천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그 소리 때문에 세상은 변했다.

 

그리고  87년 내가 대학들어갔을때에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일어나고 ,국민들의 민주화염원은 더욱 거세지고

각 대학정문마다 학생들 데모가 유행하다시피했다.

대통령직선제를 관철하는 또 한번의 세상을 변하게 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아직도 서울은 서울이고, 광주도 그대로 광주다. 서울외곽을 둘러친 북악과 남악도 그대로다. 동서악도 마찬가지다. 무등산도 그대로 무등산이고, 지리산도 우리가 풀어 놓은 곳만 빼면 천왕봉을 안은 채 그대로다.

그 세월 동안 우리는 그렇게 많이 깨고 부수고 파헤쳐 들추어냈지만, 서울 땅은 서울 땅이고, 대전 땅은 대전 땅이고 대구, 부산, 광주 땅 모두 그대로 그 땅들이다. 산하를 적셔 생명을 키워내는 이 땅의 모든 강도 매한 가지다. 한강은 한강이고, 낙동강도 금강도 섬진강도 모두 그 강 그대로다.

 

오늘 우리는 4대강을 살린다며, 그 강들을 사람의 강으로 파헤쳐 쌓고, 묻고, 덮고 하지만 숱한 세월이 흐른 뒤, 뒤 뒤돌아보면, 변할 것 같았던 그 강들이 여전히 그 강으로 그 자릴 지킬 것이다. 그리고 그 강은 그 모습 그대로 우리의 후손을 품어 안고 숱한 생명들을 지켜내며, 여전히 흐를 것이다.

지난 10년의 세상은 한반도 역사 상 가장 조용한 10년이었다. 울려나던 것은 고작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인간 노무현의 소리가 있었고, 그 이전에는 "예- 우리는"하던 김대중의 거친 호흡 소리만이 있었다.


 

이참에 그 이전의 세상까지 한번 짚어보자. 그 이전은 요란한 소릴 내던 시대였다. "핵-교"라며 국민을 웃음 짓게 했던 김영삼의 시대가 있었다. 김영삼의 시대는, 세상을 긴장시킬 만한 것으로 우리 사는 세상에 금융실명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요사이 우리가 가끔 잔혹한 희극을 볼 수 있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즉, 돈을 창고에 두거나 땅에 묻거나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돈 먹는 '소통령'의 이야기는 더 재밌다. 그와 모 여배우와의 일화는 오래도록 우리 뇌리에 남을 것이다.


 

그 이전에는 "보통사람"을 유난히 강조했던 노태우의 시대가 있었고, 또 그 이전에는 "본-인이'하던 시건방지면서도 사랑스러웠던 전두환의 시대가 있었다. 그 시기는 모두에서 말한 잔혹한 역사의 시대였다. 그 해 오월은 천지가 진동했다. 내전이라고 할 만큼 치열했던 소위 5.18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또 그 이전에는 지붕을 개량하고, 새마을 노래에 맞춰 다함께 노래를 불러야 했던, 그렇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 모두가 가난을 물리치고 더 잘살 수 있다며 반강제적이었지만 온 국민이 힘을 합쳐 일했던 박정희의 시대가 있었고, 또 그 이전에는 살짝 민주의 흔적을 남긴, 어중 띤 윤보선과 장면의 시대가 있었다.

이승만의 시대와 앞서 살핀 이들의 시대를 넘어 이명박의 시대 속에 지금 우리가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시 산천을 깨어낼 듯 요란한 미움의 소리들로 또 다시 거리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반값등록금을 실현하라며, 그해 오월처럼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학내에서는 대학의 법인화를 반대하며, 총장실을 점거한 사례도 있다. 소위 최고의 명문이라 일컫는 서울대학교의 일이다. 어디 이 뿐인가? 비교적 잠잠했던 노동자의 거친 구호 또한 세상으로 하나 둘 세어난다.

하지만 이 소리들 모두 곧 지워질 소리들이다. 이 소리들로 세상은 다시 흔들리고 있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 있는 우리 모두가 불안과 초조 속에 있다. 그 여파로 사회가 거친 숨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거친 호흡이 연잇는다면, 이내 그것을 유지하던 심장마저 파열한다.

한발 더 나서면 심장의 파열과 함께 민란을 답습한다. 일단 시작된 그 민란은 한국을 깨트릴 것 같은 기세로 전체 사회로 번져난다. 사실이지 이로 인해 많은 국민은, 한국이 곧 다시 깨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며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장담 하건데 그 두려움은 순간적이다. 즉, 제아무리 거친 세상의 소리라고 할지라도 그 소리들은 이제 곳 역사가 되어, 한 때의 사람 산 흔적으로만 남을 뿐이다. 그 소리들이 이내 그 속에 고이 묻히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들이 무슨 일을 했고, 또 무엇을 하고자 했든지 간에 그 속에서 울려나던 세상의 소리는 언제나 요란했고, 산천을 깨어 어디론가 던져 버릴 것처럼 굉음을 토했지만 이내 허공에 빨려들어 그저 희미한 흔적만을 남긴다. 그렇다고 그것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소리들로 인해 우리가 맞은 세상은 달라졌다.


 

하지만 산천은 예 그대로다. 혹자는, 서울이 예전의 서울이 아니고, 대전, 대구, 부산, 광주도 아파트라는 것들과 빌딩이라는 것들로 채워져 옛 모습을 잃었다고 말하며, 그것들이 어이 변하지 않았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착각하도록 일시적으로 변해 있는 것일 뿐 본성으로써 그것들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한편, 그 같은 변화는 새로운 변화를 통해 이내 제자리로 되돌린다. 이게 자연이다. 환경은 변할지 모르지만 자연은 언제나 제 모습으로 되돌리는 강한 힘(우주)의 지배 속에 있다. 세상은 흔들려도 산천이 늘 제자릴 지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신 목구멍 속의 가시 같은 이도, 한 없이 당신을 사랑한 당신의 부모도 모두 세상의 한 부분으로서 존재하다 사라진다. 힘(우주)의 본성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다만 사람 사는 세상은 앞서 보았듯이 언제나 변한다. 자연히 본성을 되돌리려는 힘에 의해 그 속의 모든 존재 또한 반드시 깨어진다. 의미 있는 존재조차도 깨어져 의미를 잃는다. 그렇다고 서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게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존재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즉자적 존재라 할지라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자연 속에서 종래 그 의미를 모두 잃는다. 형상을 한 그 모든 존재가 깨져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이 같은 진리는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모두에 대해 관대해야 할 이유를 제시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강조하던 존재의 의미라는 것이 참으로 허망하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 모두에 대해 관대해진다.'는 것은, 우리 모두를 더 깊이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사회를 온통 뒤덮을 듯 강하게 밀려드는, 칠흑같이 어두운 소리들에 놀란 이들이여! 그 같은 세상소리에 떨거나 결코 두려워 말라! 세상은 그 소리들로 변해가지만, 산천은 그 같이 두려운 소리에도 늘 변하지 않은 채, 당신을 안고 품어 언제나 제 모습을 지켜나간다. 인간들이여! 눈 감고 세상을 보고 자연을 보라. 어떤가?

세상은 흔들려도 산천은 늘 제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