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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아시안컵 51년 잔혹사

올소맨 2011. 1. 8. 07:52

영화에선 잔혹사의 무대가 '말죽거리'였다면 한국축구 잔혹사의 무대는 ‘아시안컵’이었다. 한국축구는 1,2회 대회인 1956년과 1960년 아시안컵 챔피언에 올랐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우승의 기억조차 흐릿해진, 반세기 동안 정상 고지를 밟지 못했다. 아시아 국가 월드컵 본선 최고 성적과 최다 연속 출전, 최다 통산 출전 등의 기록을 보유한 한국축구지만 정작 아시아의 최강팀을 가리는 아시안컵 무대서는 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아시안컵 우승 판도는 월드컵의 성적과 엇갈려 일본과 사우디아라비아, 이란이 3회씩의 정상에 올라 한국을 뒤로 밀쳐냈다.

한국축구가 챔피언에 오른 56년과 60년 대회 본선 출전국은 각각 4팀이었다. 별도의 결승전 없이 풀리그로 3경기를 치러 우승국을 가리는 방식이었다. 역사에 가정을 두거나 현재로의 치환은 적절하지 않지만, 한국이 차지한 두 차례의 우승마저도 아시아 최강이라는 수식어를 달기에는 머쓱한 면이 없지 않았다.

부지하세월 우승을 기다린 것만도 못내 자존심이 상한데 아시안컵은 감독 중도 사퇴라는 멍에를 한국축구에 남긴 독이 든 성배였다. 문정식, 박종환, 허정무, 쿠엘류, 베어벡 감독 등이 아시안컵 참패에 치명상을 입고 한국대표팀 수장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독도 그냥 독이 아닌 치명적인 독을 품은 아시안컵이었다.

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한 한국축구가 유독 아시안컵에서 맥을 추지 못한 이유는 무얼까?

과거는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다. 과거의 거울에 비춰 현재와 미래를 읽을 수 있다. 한국축구의 역대 아시안컵 잔혹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교훈이다. 한국축구 6대 아시안컵 잔혹사와 그 이유를 짚었다.

ü 잔혹사1 - 1968년 이란 아시안컵

 "정치와 이념 대립의 도구가 돼버린 축구의 좌절"

1967년 1월 현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주도한 양지축구팀이 출범했다. 형식적으로는 클럽 팀이었지만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국가권력의 힘으로 한 팀에 모은 사실상의 국가대표팀이었다. 소설책에서는 나올 법한 양지 팀이 탄생했던 건 북한축구의 경계에서 비롯됐다. 북한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아시아 국가로는 최초로 8강에 오르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체제와 이념 갈등이 극심했던 시대적 배경은 한국축구의 초조함을 더했고 이에 국가권력이 나서 북한축구에 맞설 양지 팀을 만들었던 것이다. 팀명인 양지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앙정보부의 슬로건에서 따온 것이다.

국가권력이 나서 최고의 대우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양지 팀으로 불러들인 선수는 이세연, 김정남, 김호, 이회택, 박이천, 정병탁, 정강지, 허윤정 등 당대 최고수들이었다. 그 해 여름 국가대표팀으로 이름만 바꾼 양지 팀은 대만에서 치러진 1968년 이란 아시안컵 지역예선에 참가했다. 일본과 한 조에 묶였으나 역대 전적에서 월등하게 앞서 있는데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만 등 일본 이외의 팀들도 강하지 않았던 탓에 무난한 본선 행을 자신했지만 결과는 뜻밖이었다. 첫 경기 인도네시아전에서 가까스로 비기더니 두 번째 경기 일본전에서 1-2로 무너지면서 치명타를 입었다. 초반 2경기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성적도 적지 않은 타격이었지만 일제 강점기의 상처가 생생했던 시절 일본전 패배는 국민적 공분과 대표팀의 충격을 더했다. 정병탁이 한 골을 넣는데 그치며 패한 당시 일본전 결과는 역대 한일전 3번째 패배기도 했다. 팀 분위기가 급격히 침체된 한국대표팀은 필리핀을 잡으며 일어서는 듯 했지만 예선 최종전 대만전에서 0-1로 패하며 사상 최초로 아시안컵 본선에 오르지 못하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양지 팀의 본선행 실패는 상대를 쉽게 여긴 자만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축구대표팀을, 스포츠를 정치적 도구로 삼는 패착과 조급함이 부른 화이기도 했다. 열린 과정과 경쟁, 팀 조화 등을 고려하지 않은, ‘축구스럽지’ 않은 관 주도 탁상행정의 부작용이었다. 중앙정보부는 67년 여름 아시안컵 지역예선의 실패가 팀 훈련 부족 탓이라는 결과를 내리고 1970 멕시코 월드컵을 1년 앞둔 1967년 서독,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위스 등지를 오간 105일의 유럽 원정 훈련이라는 전무후무할 프로젝트를 감행하기도 했다.

차범근, 이회택, 박이천 등이 나선 한국대표팀은 72년 태국 아시안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ü 잔혹사2 - 1992년 일본 아시안컵

"자만하는 순간, 이미 추락은 시작되었다"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는 스포츠 세계에서 절대적으로 피해야 할 것 중 하나가 자만이다. 승자의 경계 대상이 자만이라면 패자가 버려야 할 것은 패배의식이다. 객관 전력과 수치를 뒤엎는 이변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축구에서는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이 자만과 패배의식이다.

무슨 일도, 어떠한 결과도 일어날 수 있다. 절대 강자와 약자의 선을 긋는 순간, 추락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

1992년 일본 아시안컵 본선 진출 좌절은 한국축구의 자만과 집중력 저하가 부른 쓰디 쓴 결과였다. 90년대 초반은 월드컵과 올림픽 본선의 연속 출전 등으로 아시아 지역 대회는 쉽게 보거나 힘을 다하지 않는 일종의 경시 풍조가 팽배했던 시기다.

한국축구협회는 92년 6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안컵 지역 예선에 ‘국가대표팀’이 아닌 ‘실업선발팀’을 출전시켰다. 최길수 감독을 위시로 주택은행에서 뛰던 노상래를 비롯해 박철, 차승룡, 이현철, 류웅렬, 우홍균 등 축구팬들에게조차 생소한 얼굴이 여럿 포함됐다.

방글라데시, 태국과 지역 예선을 치러 본선 행을 자신한데다 한 달 뒤로 다가온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본선을 대비하기 위해 대표팀을 이원화한다는 것이 축구협회의 아시안컵 예선 실업선발팀 파견의 이유였다.

자만의 결과는 참담했다. 한국의 실업선발팀은 방글라데시를 제압했지만 태국에게 패하며 또 다시 아시안컵 본선 진출 좌절이라는 고배를 들이켜야 했다. 68년과 76년에 이은 역대 3번째 아시안컵 본선 진출 실패의 상처였다. 정책적 판단의 잘못을 인정한 축구협회는 대표팀 개혁 작업에 돌입했고 체계적인 국가대표팀 관리를 위해 사상 최초로 대표팀 전임감독제 제도를 도입했다. 대표팀 감독을 임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축구협회는 92년 7월8일 김호 감독을 대표팀 전임 감독으로 선임했다. 전임 1호 사령탑인 김호 감독의 계약 조건은 계약금 2,000만원과 연봉 3,600만원, 월 판공비 200만원에 계약 기간 2년이었다.

ü 잔혹사3 - 1984년 싱가포르 아시안컵

"무승 조별리그 탈락, 유일한 프로리그 보유국의 충격"

1984년 싱가포르 아시안컵은 한국이 본선에 오른 대회 중에서 유일하게 조별리그에서 탈락

한 대회다. 단 1승도 거두지 한 것은 이때가 유일했을 정도로 참혹한 성적표를 쥐었다.

스쿼드 파워가 떨어졌던 것도 아니었다. 쟁쟁한 멤버가 여럿이었다. 은퇴 이후 K리그 지도자로 이름을 떨친 박경훈, 박성화, 조영증, 최진한, 허정무, 박창선, 이태호, 변병주 등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싱가포르 아시안컵에 나섰다. 86년 멕시코 월드컵을 앞둔 시점으로 막강한 맨 파워의 한국대표팀은 내심 24년 만의 아시안컵 제패를 자신했지만 2무2패 최하위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아들어야 했다. 한국이 4경기에서 넣은 골은 단 한 골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전의 이태호 골이 한국의 본선 무대 유일한 득점이었다. 한국은 쿠웨이트 0-0무, 시리아 0-1패, 카타르 0-1패 등 빈공 끝에 조별리그에서 떨어졌다.

한국의 싱가포르 대회 충격의 조별리그 탈락은 복합적인 악재의 산물이었다. 당시 국가대표팀은 86멕시코월드컵과 88서울올림픽을 따로 준비하는 이원화 체제로 운영됐다. 월드컵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일명 88팀)으로 나눠 운영했는데 당시는 올림픽축구에 나이 제한이 없어 국가대표팀이 참가한 터라 2개의 A팀이 운영된 셈이었다. 힘과 집중력의 분산이 불가피했다. 월드컵대표팀은 문정식, 올림픽대표팀은 박종환 감독이 이끌었다. 싱가포르 아시안컵엔 문정식 감독이 이끄는 월드컵대표팀이 출전했는데 대표팀의 힘을 온전히 집중시키지 못했다. 85년 1월1일 올림픽팀과 월드컵팀이 평가전을 치렀는데 올림픽팀이 2-1로 승리하기도 했다.

K리그와 대표팀 운영의 마찰도 문제였다. 84년은 K리그가 두 돌을 맞이한 해로 싱가포르 아시안컵은 한국대표팀이 프로리그가 생긴 뒤 처음으로 치른 대회였다. 프로리그의 출범으로 기대가 커졌지만 한편으론 대표 차출과 소집 훈련 등을 놓고 마찰을 빚기도 했다. K리그와 대표팀의 관계를 정립할 규정이 미미한 가운데 빚어진 갈등이었다. 싱가포르 아시안컵에 출전한 10개국 중 유일하게 프로리그를 보유한 한국이었지만 초창기 모습은 기대만큼이나 혼선이 만만치 않았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차범근을 비롯해 최순호 조광래 등 전술적 아이콘 역할을 담당할 일부 선수들이 부상과 소속팀 마찰 등으로 제외된 것도 전력을 갈아먹은 악재였다. 결국 아시안컵 부진의 여파로 문정식 감독은 대회 폐막 석 달 뒤 해임됐고 김정남 코치가 감독으로 선임됐다.

88년 카타르 아시안컵 득점왕 이태호.©베스트일레븐

ü 잔혹사4 - 2004년 중국 아시안컵

"베트남, 오만 쇼크에 무너진 월드컵 4강의 자존심"

2003년 한국축구는 두 번의 충격적인 사건과 마주한다. 장소는 오만의 무스카트, 때는 10월이었다. 한국은 오만 무스카트에서 오만 베트남 네팔과 2004 중국 아시안컵 지역예선전을 치렀다. 객관 전력 차가 커 한국의 완승을 예상하는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1년 전 월드컵 4강의 강렬한 기억도 이미 한국을 아시안컵 본선무대로 올려놓았다. 결국 이것이 문제였다.

2002월드컵 4강의 성취는 대단한 업적임에 분명했지만 한편으론 후대에 엄청난 부담과 함께 상대팀을 가벼이 보는 느슨함을 가져다줬다. 지켜보는 팬들의 마음이 다르지 않았다. 아시아 대회는, 그것도 예선은 승리와 우승을 당연시 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래서 충격이 더했다. 한국은 지역예선에서 베트남, 오만에서 연속해서 패했고 충격적인 ‘오만 쇼크’는 한국축구와 움베르투 쿠엘류 감독에게 치명타를 입었다. 쿠엘류 감독의 경질성이 강하게 대두됐고 한국대표팀이 2004년 3월 열린 독일월드컵 지역예선 몰디브 원정에서 0-0 무승부에 그치자 결국 쿠엘류 감독은 대표팀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쿠엘류 감독에 이어 조 본프레레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지만 한국축구의 반전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은 가까스로 오만에 이어 2위로 본선에 올랐고 사령탑까지 교체했지만 이란과의 8강전에서 알리 카리미에게 해트트릭을 허용하며 3-4로 무너졌다. 한국이 본선에서 내준 두 번째 해트트릭으로 지역예선 패배에 이어 상처를 더했다. 본프레레 감독의 입지도 온전할 수 없었다.

이동국은 아시안컵 본선 개인통산 10골로 알리 다에이에 이은 최다골 부문 2위다.©베스트일레븐

ü 잔혹사5 - 2007년 4개국 공동 아시안컵

"독이 든 성배 그리고 음주 파문"

2007년 아시안컵은 대회 도중 감독 교체가 결정된 또 한 번의 대회였다. 96년과 2000년 아시안컵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박종환, 허정무 감독 등이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2007년 아시안컵 때는 대회 도중 감독 사임이 발표돼 충격을 더했다.

2007년 아시안컵은 대회 최초로 4개국이 공동개최한 대회였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이 2007년 아시안컵을 공동개최했다. 한국은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인도네시아와 D조에 편성됐다. 우승후보 사우디아라비아, 개최국 인도네시아와 한 조에 편성되며 쉽지 않은 조별리그가 예상됐고 결과는 예측보다 더 험난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1-1로 비겼고 바레인에게 1-2로 패하며 조별리그 탈락 위기에 몰렸다. 인도네시아와 최종전에서 김정우의 골로 간신히 8강전에 올랐지만 이후 행보도 시원스럽지 못했다. 8강전부터 3,4위전까지 3경기를 치렀는데 모두 0-0으로 무승부를 거두자 빈공에 대한 거센 비난이 이어졌고 결국 핌 베어벡 감독은 일본과의 3,4위전 승부차기 직후 사임을 발표했다.

이란 8강전, 이라크 4강전, 일본 3,4위전 3경기를 0-0으로 비기며 쏟아진 수비적인 전술에 대한 비판과 기대 성적에 미치지 못한 것이 베어벡 감독의 사임 이유였다. 베어벡 감독은 사임의 변으로 “한국 팬들은 경쟁적이며 늘 승리를 원한다”고 했다.

베어벡 감독의 중도 하차는 2002월드컵 이후 이어진 감독 수난사의 대미였다. 2002월드컵 히딩크 감독 이후 한국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은 4명의 외국인 지도자 중 3명의 감독이 중도 하차하는 시련을 맛봤다. 2006월드컵 아드보카트 감독만이 계약 기간을 채웠을 뿐 쿠엘류, 본프레레, 베어벡 감독은 계약 기간 도중 중도 하차했다. 한국대표팀 감독을 칭해 독이 든 성배라는 표현이 등장할 만 했다.

2007아시안컵의 생채기가 더했던 건 일부 선수들의 음주 파문 때문이었다. 음주 파문에 휩싸인 4명의 선수들은 대표팀 자격 박탈 등의 중징계를 받아야 했다.

박지성이 무릎 부상으로 결장한 2007년 아시안컵에서 한국축구는 3위를 기록했다.©

ü 잔혹사6 - 1996년 UAE 아시안컵

"두바이의 악몽, 자살까지 생각했다"

한국축구 최악의 참패였다. 96년 아시안컵이 열린 UAE 두바이에서의 쓰디 쓴 기억이다.

박종환 감독이 이끈 한국대표팀은 황선홍, 김도훈, 고정운, 유상철, 신태용, 김주성, 홍명보 등 쟁쟁한 멤버를 앞세워 오랜 세월 거머쥐지 못한 아시안컵 우승 트로피 획득을 자신했다. 당시 일화축구단의 사상 첫 K리그 3연패를 일군 박종환 감독을 향한 기대치가 더해져 우승의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았다.

하지만 경기 결과는 기대를 배반했다. 조별리그 쿠웨이트전에서 0-2로 완패하며 조 3위로 밀렸다. 다른 조에서 일본이 중국을 잡아주지 못했더라면 8강행 자체가 불가능했던 한국이었다. 가까스로 와일드카드로 8강에 올랐지만 더 큰 재앙이 한국축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의 8강 상대는 이란. 한국은 김도훈과 신태용의 골로 전반전을 2-1로 리드하며 분위기 좋게 끌어갔지만 후반 들어 기약 없이 무너지는 충격적인 참패를 당했다. 한국은 후반전에만 5골을 내주며 2-6으로 역전패했다. 특히 알리 다에이에게 4골이나 내주며 자존심을 한 없이 구겼다. 한국이 아시안컵 본선 무대에서 해트트릭을 허용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6골은 역대 최다 실점이기도 했다.

98월드컵을 앞두고 한껏 기대가 부풀어 올랐던 여론은 급속도록 악화됐고 결국 박종환 감독은 대회 직후 해임됐다. 박종환 감독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자살까지도 생각했을 만큼 개인적으로도 충격이 컸다”고 했다.

두바이의 악몽은 오일달러 파워 등에 힘입은 중동 축구 성장에 대한 인식 부족과 빠르게 진일보하고 있는 현대축구의 흐름을 쫓지 못한 역작용 등이 복잡하게 얽혀 이뤄진 참패였다.

황선홍이 출전한 96년 아시안컵의 기억은 너무나 아프다.©베스트일레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