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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혼 고취시킨 국민동요 '산토끼'

올소맨 2011. 1. 5. 07:41

민족혼 고취시킨 국민동요 '산토끼'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총 깡총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산고개 고개를
나혼자 넘어서
토실토실 알밤을
주워 올테야
 
신묘년 (辛卯年) 토끼해를 맞아 국민 동요 '산토끼'의 탄생 배경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이 노래는 일제 강점기였던 1928년 가을 창녕군 이방면 안리에 있는 이방보통학교(현 이방초등학교)에 재직하던 고(故) 이일래(1903~1979) 선생이 직접 작사, 작곡한 것으로 이방초등학교에는 이일래 선생 흉상과 산토끼노래비가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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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끼' 노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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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끼' 작곡가 이일래 선생의 흉상.


 



 

노래의 탄생 일화를 살펴보면, 이일래 선생은  창녕군 이방보통학교에 재직 중이던 1928년 낙엽이 수북이 쌓이던 가을에 조국과 함께 음악에 대한 꿈을 잃어버린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어린 장녀 명주양(당시1세)을 안고 학교 뒷산인 고장산기슭에 올라가 잔디밭에 누워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선생의 바로 앞에서 두려움도 없이 깡충깡충 뛰노는 산토끼의 모습을 보고 “우리 민족도 저 산토끼처럼 자유롭게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 나라를 되찾을 수 없을까”라는 생각으로 그 자리에서 가락을 흥얼거리다 집으로 돌아와 오선지에 곡을 만들어 적고 가사를 붙여 “산토끼”를 탄생시켰다.


 

‘산토끼’노래는 일제의 압박속에 있는 국민의 심정을 토로한 억눌린 항일사상이 담겨있는 애국의 노래이며 동심을 가득 담은 맑은 정서를 보여주고 있어 작곡 당시인 처음에는 이방초등학교 전교생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 이웃학교를 거쳐 전국으로 널리 퍼졌다. 멋모르는 어린이들은 노래가 좋아 불렀으며 나이든 어른들은 마음씨가 곱기만한 토끼로 비유되던 조국을 잃은 서러운 마음을 노래에 실었다.


 

특히 이 동요는 우리나라가 토끼형상이므로 민족감정을 유발시켰다는 이유로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는데 이선생은 노래를 만든 뒤 일제의 탄압으로 자신을 숨기고 작사ㆍ작곡가 미상으로 계속 남아 있다가 1938년도에 출판된 ‘조선동요 작곡집’의 영인본이 1975년도에 나오면서 뒤늦게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선생의 회상기록 중에서는 일제 시대 당시 윤보선 대통령의 영부인 공덕기 여사가 노래를 몇 곡 배운 뒤 거창유치원 교사로 재직하며 음악회 때 부른 노래 한 곡이 말썽이 되었던 기록이 있다. 공여사가 부른 노래 가사 중에 “내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 근화반도 그대 사랑 어디로 가느냐”라는 구절을 두고 반항적인 뜻을 들먹이며 일본순사가 공여사를 감옥에 가두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일본 순사들은 노래의 출처를 알아내고 노래를 만든 이선생이 있는 마산까지 와서 노랫말 중 “근화반도”란 무엇이냐고 따지고 들었다고 한다. 이선생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기지를 발휘해 ‘근화’라는 술집 기생의 이름을 넣어 만든 노래라고 둘러대서 화를 면한 일이 있는데 근화의 참 뜻은 무궁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생전에 술회했었다.  


 

이선생은  1903년 5월 10일생으로 경남 마산시 성호동 62번지가 본적으로 되어 있으며 마산에서 태어났다. 17세가 되던 1920년도에 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후 서울중동학교에 진학해 졸업을 하게 된다. 이후 김영환씨가 출강한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 입학해 김씨에게서 음악을 지도 받으면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이선생은 연희전문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낙향하여 창신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다시 창녕군 이방면 이방보통학교(현 이방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창신보통학교를 재직하면서‘고향’을 작곡한 이선생은 창녕의 이방보통학교에 와서‘산토끼’와 ‘단풍’을 작곡한다. 1936년부터 40년까지 5년간은 마산 제비산에 있던 호주선교사의 어학교사로 재직했고 1940년대 후반에는 일본으로 가 일본대학 예술학원 음악 과에서 본격적인 음악을 1년간 공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일래 선생의 음악생활은 연희전문학교의 김영환씨에게서 배운 바이올린을 시작으로 1926년부터 1945년 해방때까지 마산문창교회 성가대를 맡는 등 음악활동을 했다. 당시 문창교회에는 유명한 주기철 목사가 있었는데 주목사의 권유와 도움으로 성가대 지휘와 신앙심에도 열심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선생은 호주선교사 어학 교사와 일본대학 예술학원 음악과에 다닐 때 많은 곡들을 작곡했다. 약 1백 여 곡의 노래가 따로 기록된 책자가 있었으나 6.25 당시 모두 분실 됐고 지금은 아쉽지만 조선동요 작곡집에 수록된 동요를 제외하곤 발표된 곡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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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토끼악보 영인본

 
조선동요 작곡집은 1938년 1천부의 초판을 찍었으나 출판사에서 몽땅 다 가지고 가버려 다음해에 호주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재판 1천부를 다시 찍었다. 이때 이선생은 마산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지고 영어가사를 붙여 2백부는 자신이 가졌으며 7백 여부는 호주 등 세계 여러나라에 보내졌다. 조선동요 작곡집은 우리나라 에서는 홍난파 동요집 다음으로 발행된 소중한 동요집이다.
 
이일래 선생은 1947년에 15년간의 교직생활을 떠나서 초대 경상북도 상공국장을 맡게 됐으며 이후 임영신씨가 운영했던 중앙대 관사에 머물다 6.25를 만나 소장 중이던 동요집을 단 한권도 남기지 못하고 모두 분실하게 된다. 이선생은 시간이 지나간 뒤 책을 구하기 위해 수소문을 하던 중 마산에 있던 친구가 책을 구해줘 1975년 영인본을 냈다는 것이다. 당시 마산의회예식장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지고 그 해 7월 7일 오후 4시 서울 YMCA회관에서 한국동요 동인회 주최로 복간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이 동요집에는 ‘산토끼’. ‘봄노래’, ‘봄’, ‘해바라기’, ‘노고지리’, ‘엄마생각’, ‘아침’과 ‘시편23’ 등 주옥같은 동요와 성가21곡이 실려 있다. 이선생은 어린시절부터 좋아했으며 평생을 두고 음악을 떠난 1944년 이후에는 사회활동에 비해 음악활동을 소홀히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산토끼02.gif

마산 산호공원 ‘시비(詩碑) 거리’ 맨꼭대기에 위치한 '산토끼' 시비

고향인 마산에서도 1991년6월에 세웠다.


산토끼 이일래선생.gif 


산토끼이일래1.jpg

이일래 선생의 중년(위)과 말년(아래)의 모습


 

이일래 선생은 1975년을 전후해 첫딸 명주씨의 집인 서울에서 거주했으나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가곡리 202번지로 이사를 해 1979년 가을께 76세의 연세로 작고하셨다. 작고 하기 1년전인 1978년 산토끼노래비 준공 시 노구를 이끌고 참석한 선생은 “나라잃은 슬픔에 우리 아이들은 산토끼처럼 마음껏 뛰놀 수 없을까하는 마음이 떠 올라 가사를 쓰게 되었다고 당시 노래비준공에 참석한 주위 사람에게 술회하였다 한다. 
 
 

 산토끼공원.jpg

                이방초등학교 뒷산인 고장산에 짓고 있는 산토끼공원
 

 현재 이방초등 교정에는 졸업생이 세운 이일래 선생의 흉상을 비롯해 '산토끼' 노래비, 이 선생 관련 각종 기록, 토끼 사육장, 산토끼 벽화 등이 있다.
또한 창녕군은 불후의 국민동요인 '산토끼'를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이 학교 뒷산인 고장산에 산토끼 노래에 얽힌 다양한 자료, 영상물, 체험장 등을 두루 갖춘 산토끼공원을 올해 개장할 것이라고 한다.


 

http://article.joinsmsn.com/news/blognews/article.asp?listid=11993771&cat=

 

 

백배의 행복


에드워드는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에 만족하지 못하면 만족을 얻을 목적으로
어떤 ‘방비책’을 사용한다고 한다. 즉 외부에서 혹은 행위에서 만족을 얻으려
고 한다는 것이다. 알코올 중독, 겉치레, 자랑함, 지나친 활동, 변명함, 비평함,
지나친 의타심, 도피 행위, 화를 냄, 자기 연민이나 학대 등 무려 20여 가지 이
상의 방비책을 쓴다고 한다. 

방비책을 세 부류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는 아는 척, 배운 척, 가진 척, 잘 난 척, 잘못이 없는 척 상대방을 탓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방법이고 또 한 가지는 자신을 비하하고
학대하고, 아픈 척 함으로써 상대방으로부터 동정을 얻어내어 가치를 얻고자 하는
방법이다. 다른 또 한 가지는 알코올이나 쾌락 등을 통하여 일시적으로 기분을 전
환시킴으로써 자신의 존재에 대한 위안을 얻고자 함이다. 

직위, 부, 권력 등이 아닌 나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 가치를 느끼는가?
만약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면 가치를 인정받고자 어떤 방비책을 쓰는 것 같은가?
  
나 자신을 창조주께서 보신 그대로인 보배로운 존재로, 가치로운 존재로 보고서
방비책이 아닌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한다면 지금보다 백배나 행복한 사람
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송 남 용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