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주유소 습격사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화가 날 때 애꿎은 문짝을 발로 차거나,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버럭 소리를 내질러 본 경험이 있다면, 사람의 내면 어딘가에는 파괴욕구가 들어있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뮤지컬 ‘주유소 습격사건’을 보고 있다 보면 이 곳이 무대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이다. 초반부터 오가는 욕설과 고함에, 전화기가 망가지고 핸드폰은 반토막 난다. 여기저기에서 날아오는 빈 물통과, 와당탕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히는 석유통에 몇 번 놀라고 나면, 한껏 쌓아온 스트레스들이 나갈 구멍을 가슴속에 뚫어 놓은 것 같다. 평소 같으면 눈살을 찌뿌릴 것 같은 욕이 얼마나 시원한지! ‘에라이, 이 썅놈의 섀끼야!’
- 왜 주유소를 습격한 거야? 그냥!
김달중 연출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스토리 라인을 과감하게 쳐내거나 변주했다. 영화가 담고 있던 캐릭터들의 뒷이야기는 잠깐 묻어두기로 하고, 오로지 ‘주유소를 습격’하는 데에만 스토리를 집중 시켰다. 한 주유소를 4명의 강도가 습격하여, 사장 마누라가 돈을 가져오기 전까지 꼼짝 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 와중에 고등학생 일진들, 중국집 배달부, 술 취한 여직원 등이 꼬이며 웃긴 상황을 보여준다. 곧, 경찰이 출동하지만 노마크의 기지로 네 명의 습격자는 자리를 잘 빠져 나간다.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거나, 마지막에 눈물이 쏙 빠지는 감동의 비화를 기대한 사람이라면 이 상황이 낯설지 모르겠다. 하지만 생활 속에서 여기저기 머리 굴리는데 이골난 사람들에게 ‘그냥’이라는 단어를 앞세운 이 스토리는 매력적이다. 가지치기한 깔끔한 줄기에 달린 유쾌한 유머와, 힘 있는 음악이 더욱 돋보인다.
- 영화와 뮤지컬의 장점을 아우르는 신선한 무대
무대 곳곳에 숨어있는 시도가 놀랍다. 세트 이동 한번이 없는 무대인데도, 영화 못지않은 장소이동과 화면전환의 자유로움을 자랑한다. 무대에 배치된 세 개의 스크린 덕분이다. 이 스크린으로 주유소의 전경과 도심의 모습이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영화의 클로즈업 기법처럼 배우의 섬세한 표정을 담기도 한다. 이 방법을 통해 스토리에서 많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캐릭터 내부의 감정 표현을 훌륭히 보완한다. 배우 옆으로 만화처럼 말풍선이 그려지는 장면에 와서는, 이 뮤지컬의 기발함이 측정 불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기발한 습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 극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은 그토록 화려한 영상과 아이디어에 주저앉지 않고, 뮤지컬적인 요소를 잘 갖춰 놓았다는 것이다. 차 트렁크나, 주유소 자판기, 전화기 등 충실하게 살린 주유소의 전경은 만족스럽다. 솔로를 할 때 사선 위에서 떨어지는 강한 한 줄기의 스포트라이트나, 밤무대를 떠올리게 하는 후면 빤짝이 조명은 뮤지컬만의 두근거림을 준다. 단, 너무 많은 장치로 인해 솔로곡을 열창하는데 영상이 눈에 보인다거나, 2층 장면을 보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움직임이 거슬리는 게 아쉽다. 그러나 두고두고 회자 될 실험적인 무대 연출이다.
- 배우들의 카리스마
공연 마지막에는 처음 무대에 불이 켜질 때와 마찬가지로 흡족한 실루엣의 네 사람이 서 있다. ‘쓰릴미’로 느와르적 분위기를 훌륭히 몸에 익힌 최재웅과 이율의 연기는 매력적이다. 특유의 묵직함에 적당한 바보스러움을 맛깔나게 버무려낸 문종원이나, ‘천사의 발톱’에서 보여주던 소년의 이미지에 긴 머리와 공허한 웃음을 더해 미청년으로 성장한 이신성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배우들이 줄곧 관객석을 휘젓고 다니거나 무대 앞쪽에서 서성인다. 이 때 한 순간도 캐릭터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긴장감을 유지하는 모습이 좋다. 조연들도 감탄스럽다. 비보잉 군무를 구경하다 보면, 사장과 거칠녀의 몸을 사리지 않는 유머가 있다. 멀티맨과 샌님의 솔로 파트에서는 폭 넓은 발성이 놀랍다. 어느 누구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존재감과 카리스마. 카리스마(Kharisma)를 그리스어로 ‘신의 은총’이라고 하던가. 이들을 보고 있는 우리 역시 신의 은총을 풍족하게 받은 것이 아닌가.
이 두근거림이 드럼 비트인지 아니면 심장소리인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폭소를 터뜨리다 보면, 가슴이 뻥 뚫려 있다. ‘세상사는 것이 그렇고 그런 거지. 가끔 좋은 일도 생길 거라 믿고 살아가야지.’ 우리 모두 하나쯤은 스트레스를 품고 살고 있을 것이다. 공부가 잘 안되거나 취직이 힘들 수도, 연애가 꼬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럴 때 꽉 막힌 가슴을 뚫어줄 한 편의 뮤지컬 ‘주유소 습격사건’. 쳐낼 것을 과감하게 쳐내고 신선한 시도를 더해, 자신의 색깔을 찾은 이 공연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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