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좋은글

그리움

올소맨 2008. 5. 17. 04:54

인간은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 모르겠지만 가슴 한구석 빈 공간에 그리움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가을을 맞이하다 보면 이 조용히 숨어있던 내면의 그리움이 고개를 내밀고는 모두에게 나름대로의 아픔과 고민 혹은 사색이라는 선물을 주고 가는 것 같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그리움이 긴 흔적을 남기도 하는 것 같다.

그리움에도 여러 가지가 있고 사람마다 그 종류와 강도가 다르기는 하겠지만 우선은 지나간 이루지 못한 옛 사랑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겠고, 첫사랑에 대한 풋풋한 그리움,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혹은 아쉬움, 뚜렷한 이유는 없더라도 무언가 날마다 가슴 한 편이 비어있다는 까닭 없는, 인간이면 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그리움, 노년의 외로움, 아니면 나보다도 먼저 죽음으로 이별을 하고만 가족이나 친지 친구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에 대한 그리움 등...

더욱 추수가 끝난 텅 빈 들판으로 차가운 늦가을의 바람이 불어올 때엔 이런 그리움 때문에 목이 메어오는 분들이 많다. 지나간 세월에 대한 후회와 원망, 자신의 현실에 대한 불만족, 잘못된 만남 때문에 겪는 쓰라린 아픔, 가고싶었는데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 사랑하는 사람을 못 만나서 겪는 괴로움,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괴로움, 이런 것들 때문에 옛 성현은 지옥이나 천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야말로 바로 지옥이 되기도 하고 천국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던 것 같다.

젊었을 때 헤어진 연인에 대한 단순한 그리움에서부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여러 가지 많은 세속적인 일에 대한 욕심과 야망 그리고 그것을 이루지 못해 느끼는 좌절감과 후회와 회한에 찬 노년의 그리움들이 서로 엮어져서 세상은 영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나의 그리움은 무엇인가? 이렇게 계절이 길게 흔적을 남기고 지나가면서 해마다 나에게 남기는 그리움의 흔적은 무엇이고 그 그리움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선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일 수도 있을 것 같고, 선택하지 못한 다른 직업에 대한 갈망일수도 있고, 아니면 인생은 무엇이고, 삶은 무엇이고, 또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시작도 끝도 없는 철학적인 물음일지도 모르겠다.

갈대가 몸 전체로 가을바람을 맞이하듯이, 또 이름 모를 산등성이에 무리를 지어 피어있는 억새풀을 바라보면서, 너무나 파아란 가을하늘을 보면서, 잎은 다지고 빠알간 감만을 달고 있는 감나무를 보면서, 길가에 가로수의 은행잎이 노오랗게 물들면서, 내게 가져다주는 이름 모를 그리움은 아마도 나를 다시 한번 더 부족했던 과거를 겸손하게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맞이하라는 자연이 주는 소박한 계시는 아닌지? 나의 삶도 언젠가는 은행잎 같은 황혼과 함께 종말이 오고 조용히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전조는 아닐까?

계절의 바뀜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적은 시간 속에서 우리가 느끼고 보고 듣고 하는 것들이야 물론 미약하고 한정된 것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한번은 그 적은 몫이라도 챙겨보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닐까? 어쩌면 이런 각자에게 배당되는 각자의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것이 각자의 삶은 아닐지?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 가을을 맞고 보내면서 내 가슴에 배당된 그리움의 본질을 알아보고 싶은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 그리움의 본질을 낱낱이 다 분석하고 파헤치는 것보다는 한 켜 낙엽 위에 조용히 묻어두고 두꺼운 겨울눈 속에 남겨두었다가 내년 봄에 아지랑이와 함께 꺼내어서 인생의 여정에 안내자로 삼는 것은 어떨까? 한번쯤 지나가는 계절의 여울목에서 각자의 가슴에 남아있는 그리움의 흔적이라도 찾아보고 더듬어보는 것도 나름대로의 가을을 보내는 좋은 방법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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