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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예언'정도전은 누구인가?

올소맨 2008. 5. 6. 03:22

정도전의 예언으로 인터넷을 강타하고 있는 정도전은 과연 누구일까?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의 본관은 봉화(奉化)다. 봉화(奉化) 정씨(鄭氏)는 본래 향리 가문이었으나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鄭云敬·1305∼66) 대에 와서 과거에 급제해 양반 가문으로 발돋움했다. 운경은 형부상서까지 지낸 청렴결백한 관료였다. 정도전은 후일 역적으로 몰려 죽었기 때문에 기록이 부실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1396년(태조 5) 명나라가 정도전을 압송해 보내라고 했을 때 나이가 55세가 되어 갈 수 없다고 한 것을 보아 1342년(충혜왕 복위 3)에 태어난 것으로 추산된다. 그의 출생지도 개경의 삼각산(三角山)과 단양(丹陽)의 삼봉이라는 설이 있을 뿐 정확한 장소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독서를 좋아했다고 한다. 아버지인 운경이 경학의 대가인 이 곡(李穀)과 친했기 때문에 이 곡의 아들 이 색(李穡)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등 훌륭한 학자들과도 사귈 수 있었다.

정도전은 1360년(공민왕 9) 과거시험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섰다. 그러나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않았다. 공민왕이 신돈(辛旽)을 기용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에 은거했으며 이듬해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잇따라 숨을 거둬 영주(榮州)에서 3년간 여묘(廬墓:상제가 무덤 근처에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 생활을 하며 제자를 양성했다.

신돈이 제거된 후 성균박사에 기용됐으나 1374년(공민왕 24)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다시 정치적 파란을 겪는다. 그 때 정국은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대결하고 있었다. 정도전은 친명파에 속했다. 1375년(우왕 1) 원나라의 사신이 왔을 때 이인임(李仁任)은 정도전을 영접사로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내가 사신의 목을 베어 오거나 체포해 명나라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정도전은 나주 회진현(會津縣)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9년간 귀양가게 되었다. 정도전이 정치적 회생의 기회를 잡은 것은 1383년(우왕 9) 함주(咸州)에 있던 이성계를 찾아가면서부터다. 혁명을 하기 위해 이성계의 군사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성계는 개혁을 주장하는 정도전에게 협력하기로 하고 지원을 약속했다.

이것이 조선 왕조 탄생의 전주곡이었다. 이후 정도전은 이성계의 후원을 받아 혁명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이후 작업에 더욱 가속이 붙었다.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옹립했다. 그리고 토지개혁을 실시해 구귀족의 생활 기반을 빼앗아 신귀족에게 주었으며, 1392년(공양왕 4) 7월에는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 왕조를 건국했다. 


조선 왕조가 개창되자 정도전은 왕명을 받아 새 왕조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편민사목’을 만들어 발표했고 목은 이 색 등 반대파를 제거했다. 이후 이성계의 뜻에 따라 강비(康妃)의 아들인 방석(芳碩)을 세자로 삼았다. 이른바 조선 왕조의 설계자였던 셈이다.

정도전은 한양 천도에도 많은 역할을 했다. 경복궁 자리도 정도전이 잡은 것이다. 정도전은 풍수(風水)를 잘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무학(無學) 대사는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궁궐을 세워야 한다고 했으나 정도전은 반대했다. 그는 무학대사가 추천한 위치는 동향이며 터가 너무 좁아 왕도로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경복궁이 현재의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다. 

 

정도전은 1398년(태조 7) 8월26일 방원(芳遠)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에 희생되어 숨을 거뒀다. 

정도전의 죄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방석을 세자로 추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복형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정도전은 역적으로 몰려 죽었기 때문에 조선 왕조 내내 신원되지 못했다. 그러다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고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1865년(고종 2) 그의 관직을 회복시켜 주었다.


정도전의 묘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족보에는 경기도 광주(廣州) 사리현(士里峴)에 있다고 했으나 김정호의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 과천현조에는 과천 동쪽 18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