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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지교'에 숨어있는 고사성어(부형청죄)

올소맨 2008. 1. 31. 03:55

진나라가 조나라에 '정상회담'을 제의했다.  두 나라의 임금이 만나서 담판을 하자는 제의였다.  번거롭더라도 조나라 임금이 진나라를 직접 방문해달라고 요청했다.  공식적인 '초청'이었다. 

 

조나라는 진나라의 속셈이 궁금했다.  초청했다가 강제로 억류하려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나라 임금은 측근인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를 불렀다.  논의 끝에 회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거부할 경우 '겁쟁이'라는 소문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무신인 염파는 남아서 나라를 지키고 문신인 인상여가 임금을 수행하기로 했다.

 

두 임금은 회담을 앞두고 술자리를 벌였다.  난데없이 진나라 임금이 조나라 임금에게 비파 연주를 들려달라고 요청했다.  당돌한 요청이었다.  그런데도 조나라 임금은 그 요청을 선뜻 수락했다.  연주 실력을 보여줬다. 

 

그러자 배석했던 인상여가 말했다.  "우리 임금이 악기를 연주했으니, 진나라 임금도 연주해야 한다."  진나라 임금이 인상여의 주장을 들어줄 리 없었다. 

 

인상여가 다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나는 지금 칼로 내 목을 찔러 피를 흐르게 할 수도 있다."  자기 목을 찌른다고 했지만 수틀리면 진나라 임금을 찌를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진나라 임금은 슬며시 겁을 먹었다.  결국 소부라는 악기를 연주했다.

 

회담이 시작되었다.  진나라 신하가 말했다.  "우리 진나라 임금의 만수무강을 위해 조나라의 성(城) 15개를 넘겨줄 수 없는가."  인상여가 곧바로 받아쳤다.  "우리 조나라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뜻에서 진나라의 수도 함양성을 넘겨줄 수 없는가."

 

이런 말들이 오고갔으니 회담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었다.  중단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조나라는 인상여의 활약으로 진나라의 콧대를 누를 수 있었다.  조나라 임금은 인상여에게 상경(上卿)이라는 최고 벼슬을 내렸다.

 

인상여가 벼락출세를 하자 염파가 발끈했다.  염파도 같은 상경이지만 인상여의 '호봉'이 더 높았던 것이다.  염파는 인상여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나는 전쟁터를 무수하게 누빈 공으로 떳떳하게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인상여는 보잘것없는 '세 치 혀'를 놀려서 나보다 높은 자리를 받았다.  모욕을 참을 수 없다.  그대로 두지 않겠다."

 

노골적인 '도전'이었다.  인상여는 염파가 자신을 벼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인상여는 염파를 피했다.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마주칠 것 같으면 수레를 돌려 피해가도록 했다. 

 

인상여의 이런 행동은 손가락질 대상이 되었다.  측근에서조차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렇지만 인상여의 생각은 달랐다. 

 

"진나라가 우리를 침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염파와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염파와 다툰다면 서로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진나라에게 이익이 된다.  나는 진나라 임금에게까지 악기를 연주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깡다구' 있는 사람이다.  얼마든지 염파를 상대할 수 있지만, 개인적인 감정은 나중 문제다."

 

염파가 이 말을 전해들었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웃통을 벗은 채, 가시나무로 만든 회초리를 한 짐 가득 짊어지고 인상여를 찾아갔다.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염파와 인상여는 화해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서로를 배신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생사를 함께 하는 친구가 되었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문경지교(刎頸之交)'다.  잘 알려져 있는 고사성어다. 

 

그런데, 이 '문경지교' 속에 또 하나의 고사성어가 숨어 있다.  염파가 가시나무 회초리를 짊어지고 인상여를 찾아가서 때려달라고 부탁한 '부형청죄(負荊請罪)'라는 고사성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처벌을 자청한다는 뜻이다.  '문경지교'보다 덜 알려진 고사성어다. 

 

염파는 '부형청죄'를 했기 때문에 후세에 아름다운 '문경지교'를 남길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부형청죄'를 해도 용서받을까말까한 사람이 되레 삿대질이다.  그래서 용서받을 기회마저 놓치고 있다.  역사의 평가 역시 좋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정선 기자 (csnews@cs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