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성(性) 문화 ..................................... 마광수
'21 세기의 성’이라는 주제를 놓고 생각해 볼 때, 이전과 달라진 것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 될까? 내 생각에 아마도 그것은 ‘남성 주도의 성’이 ‘여성 주도의 성’으로 바뀌는 것이 될 것 같다. 한마디로 말해서 ‘양(陽)’이 지배하던 세계가 ‘음(陰)이 지배하는 세계로 바뀌는 것이다.
20세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성의 혁명’이 일어난 시대였다. 20세기에 이룩한 성의 혁명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경구용 피임약’의 개발일 것이다. 1960년대 이후로 여성용 피임약이 다량으로 보급됨으로써, 여성들은 ‘임신의 공포’와 ‘육아 부담’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와 동시에 여성들은 ‘쾌락으로서의 성’에 훨씬 더 적극적이게 되었고, 남성들보다 한결 즐거운 성적 오르가슴을 당당하게 보장받게 되었다.
인간이 동물들과 다른 특성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여성들이 갖고 있는 무한한 성적 능력이다. 인간의 여성은 격렬하면서도 다양한 오르가슴을 오랜 시간 맛볼 수 있게 되어 있고, 또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행위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남성은 여성보다 ‘성욕’은 강할지 몰라도 ‘성 능력’면에서는 뒤떨어진다. 아무리 정력이 센 남성이라 할지라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교행위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까닭은 남성은 성교행위시에 정액을 사출(射出)해야 하고, 정액의 사출은 피로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예전 중국에서는 남성이 평생동안 사출할 수 있는 정액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고 믿었다.
여권 신장과 피임약의 발달
여성들은 그동안 ‘임신’과 ‘육아’로 인해 자신의 성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었다. 또한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도는 여성들로 하여금 ‘정절’과 ‘모성(母性)’을 갖도록 강요함으로써 여성들의 성적 욕구를 억눌렀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의 발달로 인한 여권의 신장과 피임약의 발달은, 여성들의 사회적 신분 상승과 사회활동을 가능케 해줌과 동시에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새롭게 자각시켰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남성에게는 ‘거세 공포증’이 있고 여성에겐 ‘남근(男根) 선망’ 심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여성통제와 가부장주의로 무장되어 있던 20세기 초엽까지의 유럽 사회에서는 그의 이론이 그런대로 적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해방이 가시화하기 시작한 20세기 후반부터 프로이트의 이론은 현실에 맞지 않게 되었다.
상당수의 남성들은 이제 거세를 겁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세를 원하고 있다. 성전환수술을 받고 여성이 되기를 바라는 남성들이 바로 그들인데, 그들은 남성 성기를 가진 것을 수치스럽고 억울하게 여기며 어떻게 해서라도 ‘거세’를 해 여성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거세까지는 안 가더라도 여성처럼 꾸미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수많은 ‘복장도착자’들이 있다. 이에 반하여 남성처럼 되고 싶어하는 여성 복장도착자들의 수는 비교도 안 되게 적다.
기계문명이 발달하기 이전까지의 역사는 남성들로 하여금 ‘자식 생산’에 골몰하도록 했다. 생태계에서 번식만큼 중요한 것은 없고, 또 인력(人力)을 대신할 만한 노동수단이 달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성들이 성적 쾌감에 탐닉하지 않고 자식 낳기와 자식 기르기에만 전념하도록 하는 문화적 관습과 장치들이 만들어졌다. 회교 사회에서 발달한 여성용 베일 착용 관습은 여성들이 가정 밖에서 성적 교제의 기회를 갖는 것을 막기 위해 고안된 것이고, 아프리카와 중동 일부 문화권에서 시행된 ‘클리토리스 (음핵) 자르기’ 관습 역시 여성의 성적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부권(父權) 중심 사회는 언제나 여성의 성감을 통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남녀평등 의식의 확산과 여성의 사회참여 기회 확대는 여성들로 하여금 많은 성적 교제의 기회를 갖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여성의 혼외정사가 남성의 혼외정사만큼 많아지게 되었고, 결혼에 구속되기 싫어하는 여성 독신자들의 숫자도 늘어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인구의 폭발적 증가는 ‘생식적 성’보다 ‘비생식적 성’, 즉 ‘쾌락을 위한 성’에 더 비중을 두게 만들어, 여성의 자유로운 섹스가 더욱 활발해지게 되었다. 이런 변화에 결정적 촉진제 역할을 한 것은 역시 앞에서 말한 여성용 피임약의 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여자 앞에서 작아지는 남성들
여권신장과 더불어 여성의 성적 쾌락 추구가 활발해지자 남성들의 성은 상당히 위축되었다.여성들이 당당하게 요구하는 ‘오르가슴의 충족’을 감당해 내기엔 남성들의 정력이 형편없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20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여성은 그저 남성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만 하는’ 존재에 머물렀고, 오르가슴의 충족을 적극적으로 바라는 여성이 있다면 그런 여성은 ‘음탕한 여자’로 취급되었다. 여성들 또한 임신에 대한 공포 때문에 성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성이 성의 적극적 주체로 변하자 남성들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21세기 초인 요즘 남성들의 정자(精子) 수는 50년 전에 비해 반 정도로 줄어들었다는 의학계의 발표는 바로 이런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의학자들 상당수는 공해 증가에 따른 환경호르몬의 확산을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지만, 내 생각엔 꼭 그것 하나만 원인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여성들의 ‘성적 적극성’이 남성들의 ‘성적 우월감’을 움츠러들게 만든 것이 정자 수의 감소를 야기한 또 하나의 심리적 원인으로 추가돼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남성들이 ‘성교’를 은근히 두려워하는 현상은 사실 예전부터 있어 왔다. 이른바 ‘변태성욕’으로 치부되는 사디즘, 마조히즘, 페티시즘 (여성의 성기에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게 아니라 머리카락이나 발 같은 여성 신체의 일부분이나 하이힐이나 특정 장신구 같은 여성 신체에 부착된 물건에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성심리), 관음증(觀淫症), 복장도착증 같은 것들은 성교행위를 하지 않고서도 성적 만족을 얻는 특이한 성취향인데, 이런 ‘변태성욕’의 주체는 대개 남성이었던 것이다. 요즘 들어 이런 특이한 성 취향자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남성들이 성교행위에 대해 더욱더 공포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성 전문가들에 따르면 여성이 이른바 ‘변태성욕’에 빠져드는 경우는 남성이 변태성욕에 빠져드는 경우보다 훨씬 적고, 설사 빠져든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남자’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 그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남자 애인이 마조히즘적 섹스를 좋아할 경우, 여성은 애인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 사디스트 역할을 ‘연기’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예전엔 사디즘적 섹스를 선호하는 남성들이 많았지만 요즘엔 마조히즘적 섹스를 선호하는 남성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다. 요즘 서구에서 은밀히 유행하고 있는 ‘S·M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줄인 말) 클럽’에 출입하는 남성들 열 명 가운데 아홉 명은 마조히스트 역할을 원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디스트는 무지막지하게 때리는 자라기보다 일종의 ‘지배자’이고, 마조히스트는 무지막지하게 얻어맞는 자라기보다 일종의 ‘순종자’이다. 상당수의 남성들이 순종자 역할을 하며 성적 만족을 얻는다는 사실은, 즘 남성들이 ‘능동적 성행동’에 부담을 느껴 ‘수동적 성행동’으로 도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왜 삽입성교를 기피하는가
이처럼 삽입성교를 기피하는 ‘변태성욕자’들이 늘어나 범상한 사회현상으로까지 확산되자, 이젠 성의 학자들도 ‘변태’라는 말을 쓰지 않게 되었다. 가학적 살인 같은 극단적 행위가 아닌 한 여러 가지 ‘유희적’ 변태성욕들은 이제 ‘특이한 성적 취향’으로 불리게 되었고, 일부 선진국의 의학사전에서는 아예 ‘변태성욕’이란 항목이 빠져버린 지 오래다. 변태성욕이 정신병적 질환으로 취급되지 않게 된 것은 물론이다. 다만 한국처럼 수구적 봉건윤리가 지배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는 나라에서만 ‘변태성욕’이 과장적으로 문제시 되어, 이른바 ‘음란(또는 외설)’의 표본으로 배척되고 있을 뿐이다.
미국의 경우, <킨제이 보고서> 나온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구강성희(오럴섹스)’는 ‘변태’로 취급되었다. 그렇지만 요즘엔 구강성희가 가장 보편적인 애무형태로 확산되어 있다. 한 보고서에 의하면, 매춘부를 찾아가는 요즘 미국 남성 대다수가 매춘부에게 요구하는 성행동은 구강성희라고 한다. 그러나 1950년대 미국 남성 대다수가 매춘부에게 요구했던 성행동은 삽입성교였다. 이런 사실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20세기 말의 남성 대부분은 삽입성교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여성의 성적 만족감’이다. 여성은 삽입성교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신체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를테면 구강성희의 경우 그것이 ‘전희(前戱)’ 역할로만 머물기를 바란다. 다시 말해서 삽입성교가 ‘메인 게임’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성들은 점점 더 삽입성교를 두려워 해가는 중에 있으므로, 여성들은 차츰 남성들을 얕잡아 보게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성에 개방적인 선진국의 경우엔 여성들을 위한 ‘모조 페니스’ 같은 성상품들이 다양하게 개발되어 팔리고 있다. 그래서 여성들은 남성 없이도 물리적 오르가슴을 충분히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들은 점점 더 볼품 없는 ‘무용지물’이 되어갈 수밖에 없고, 여성들에게 더이상 성적으로 군림할 수 없게 되는 처지에 이른다.
게다가 현재의 상황에서는,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아직은 훨씬 더 무거운 의무감과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사회체제에 종속되어 있다. 남자들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하고, 군대에 나가 용감하게 싸워야 하고, 힘겹고 거친 노동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남성들은 더 초췌해질 수밖에 없고, 평균 수명도 여자보다 훨씬 짧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21세기 말쯤에는 남성중심사회가 여성중심사회로 완전히 뒤바뀌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쉽게 말해서 원시시대의 모계사회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실추되는 남성의 권위
모계사회로 되돌아가는 징후들은 벌써부터 선진국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다. ‘당당한 미혼모’의 증가 현상이 대표적인 예인데, 아이의 아버지 (또는 자신의 남편) 없이 아이만 기르겠다는 독신 여성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섹스가 없는 독신생활이 아니라 프리섹스를 즐기는 독신생활이기 때문에 여성은 성적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는 아버지를 의식하지 않게 되고 오직 어머니에게만 종속하게 된다. 말하자면 ‘일처다부제’ 비슷한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인데, 이럴 경우 남성의 가부장적 권위는 당연히 실추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남성들은 ‘엄한 아버지’의 이미지와 ‘엄한 가장(家長)’의 이미지를 갖고서 남성중심사회를 이끌어 왔다. 그런데 반드시 ‘아버지’가 있어야 ‘가정’의 위상이 선다는 생각이 희석되는 상황이 되고 보면 남성의 사회적 지위는 하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많은 인류학자들은 인류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 또는 남권사회(男權社會)로 바뀐 것이 농경생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한 장소에 정착해 농경생활을 하기 이전의 인류는 여기저기를 자유롭게 이동해 다니며 나무 열매를 채집하거나 사냥을 해서 먹고 살았다. 그런데 농경과 목축 기술을 터득하고 난 다음부터는 한 지역에 정착해 안전한 먹거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농경생활은 두 가지 부담을 가져왔다. 첫째는 무거운 ‘쟁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자신들의 경계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힘이 센 남성들이 사회적 우월권을 갖게 되었고, 여성들은 자연 남성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인류는 과거 농경사회의 전통을 버려가고 있다. 물론 선진국 수준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한테만 적용되는 사항이겠지만, 평생 한 장소에 거주하며 ‘이동’을 꺼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말하자면 여행의 자유를 즐기면서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국제화’나 ‘세계화’의 개념이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선진국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곧바로 집을 떠나고 있고, 부모가 있는 집에서 대학에 통학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 모두 ‘자유로운 혼자’가 되어 분방한 이성교제가 가능한 독립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식사 양식의 변화 역시 우리가 원시시대의 열매 채집 및 수렵 생활 비슷한 생활방식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요리를 집에서 만들어 먹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대다수 사람들은 인스턴트 식품을 사서 (다시 말해서 ‘채집’ 또는 ‘포획’하여) 먹으며 한 끼를 때운다. 또 복잡한 요리를 먹더라도 집에서 만들어 먹기보다는 식당에 가서 사 먹는 경우가 많다.
‘이동’과 ‘채집’ 위주의 이런 생활방식은 가족이나 친척들과 밀착돼 있던 집단적 생활방식을 버리게 하고, 이른바 ‘전통윤리’라는 것을 거부하게 만든다. 전통윤리의 거부는 곧바로 가부장제도의 붕괴를 가져옴과 동시에 전통적 결혼제도의 파괴로 이어지게 된다.
농경생활 양식에 기초하고 있던 지금까지의 성문화는 ‘가족의 번영’이라는 목표를 위해 여성을 집안 살림과 분만 그리고 육아에만 몰두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다시금 원시적 이동생활로 돌아갈 것이 분명한 미래의 성 문화는, 대다수의 여성들을 집 밖으로 ‘몰아낼’ 것이 틀림없다. 전쟁이나 쟁기질에 필요했던 남성의 ‘힘’도 앞으로는 특별한 능력이 되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이 기계화하고 있는 상황에는 ‘단추’ 하나만 누르면 노동이나 전쟁에 필요한 ‘힘’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추를 누를 정도의 힘은 여성도 얼마든지 가지고 있다.
남녀평등으로 가는 과도기
모계사회로 돌아갈 경우 여성들은 어떤 방식으로 성적 오르가슴을 충족시키게 될까? 비교동물학적 입장에서 보면 암컷들은 수컷들의 ‘힘’, 즉 성적 능력을 비교·평가해 봄으로써 짝짓기 대상을 선택한다. 그래야만 건강한 2세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의 인간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단순히 물리적 ‘힘’만을 숭배하고 있지 않다. 명석한 두뇌라든가 아름다운 외모라든가 사회적 지위나 부(富) 같은 것들도 다 ‘힘’의 범주에 들어간다.
여기서 여성들의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고, 여성들 역시 남성들처럼 성교 이외의 형태로 성희를 즐기는 ‘특이한 성취향(이른바 변태성욕)’에 빠져드는 경향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여성은 원래 삽입성교에 의한 오르가슴을 무한히 즐길 수 있는 신체구조를 갖고 태어났다. 그러나 인류 문명의 발달은 남성들의 ‘동물적 힘’을 퇴화시켜 허약하게 만들었다. 그렇다 보니 여성들이 남성들의 비생식적 성희를 용인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고, 부유층을 비롯한 일부 여성들은 이중생활을 통해 성을 즐기게 되었다. 남편감으로는 허약하지만 돈 많고 지위 높은 사람을 고르고 정부(情夫)감으로는 돈 없고 지위는 낮지만 동물적 정력을 가진 사람을 고르는 것이 그것이다.
D.H. 로렌스가 쓴 소설 <채털리 부인의 애인>에 나오는 여주인공 코니는 성 불구자인 귀족 남편을 버리고 미천하지만 성적 능력이 뛰어난 산지기한테로 도망간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물론 남편이 아예 성 불구라면 남편의 부(富)나 지위에 더이상 미련 두지 않고 도망쳐버릴 여성이 꽤 많겠지만, 그렇지 않고서 다만 정력이 약한 정도라면 이중생활을 통해 성욕을 충족시키려고 할 것이다. 아니면 바람까지는 피우지 않고 구강성희 등 성교 이외의 다른 방법을 통해 남편과의 성관계를 ‘적당히’ 꾸려나가는 여성도 꽤 많을 거라고 본다.
<채털리 부인의 애인>은 성교행위 이외의 성희를 엄격히 금하고 있던 시대에 쓴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 채털리 부인 같은 여성이나 채털리 같은 남편이 있다면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든 상대방의 성욕을 만족시켜 주려고 노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완전한 모계사회가 된다 하더라도 여성들이 남성들의 삽입성교 능력 하나만 갖고 남성 파트너를 선택할 것 같지는 않다. 이를테면 어떤 남성이 아름다운 용모를 갖고 있다면, 그 남성은 비록 성 능력이 약하더라도 여자들한테 사랑받을 확률이 높다. 두뇌의 명석함이라든가 사회적 지위 같은 것도 마찬가지 범주에 들어간다.
‘모계사회’가 의미하는 것은 여성의 프리섹스가 가능해지고 아이들이 어머니의 권위에 종속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사회의 지도권이 여성들한테로 완전히 넘어가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그런 극단적 역전이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 여권이 계속 신장되어 남성이 누리는 사회적 권력만큼의 힘을 여성도 같이 누리는 시대가 올 것은 틀림 없지만, 여성이 남성을 노예처럼 부리는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고 또 와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런 ‘복수’는 또 다른 형태의 전쟁을 불러일으켜 인류를 파멸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과도기이기 때문에 여성들의 성적 오르가슴 추구가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여권신장운동에 따른 ‘여성의 성적 정체성의 재자각(再自覺)’이 급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정력이 약한 남성들은 고개를 숙인 채 용한 정력제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고, 아내가 바람을 피울까봐 전전긍긍하는 의처증 환자 또한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남성용 발기유도제인 ‘비아그라’가 폭발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여성들의 ‘삽입성교 욕구’가 한결 수그러들 것이 틀림없다. 피임약의 발달은 임신 공포를 동반하지 않는 성적 오르가슴의 충족을 일단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렇지만 여성의 오르가슴 감각이 발달한 이유가 ‘임신촉진’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여성이 ‘임신’ 자체에 시큰둥해지게 되면 여성의 오르가슴 감각 역시 퇴화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해보게 된다. 이는 물론 진화론적 관점에 근거를 둔 가정이다.
또한 ‘여성에 대한 성 억압’이 완화되어갈수록 “하던 짓도 멍석 깔아주니까 안 한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시사해주는 바 그대로, 여성들의 ‘반발적 성 추구’가 한결 누그러들 것 같다는 예상도 해볼 수 있다. 따라서 남성들이 성교행위에 공포를 느껴 비생식적 섹스를 선호하게 된 것과는 다른 심리적 메커니즘에 의해서, 여성들 역시 비생식적 섹스를 선호하게 될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귀여운 남성이 사랑받는다
인간의 성이 진화된 과정을 보면 ‘생식적 성’에서 ‘유희적 성’으로 옮겨간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은 성기만 발달시킨 게 아니라 불룩한 젖가슴이나 도톰한 입술, 감각이 예민한 귓불 같은 것들을 발달시켰다. 이는 성교행위 자체와는 무관한 기관들로 성교용이라기보다는 애무용으로 발달된 것이다. 인간만큼 에로틱한 ‘키스’를 나누는 동물은 없고, 인간의 젖꼭지처럼 성감이 발달한 젖꼭지를 갖고 있는 동물도 없다. 또한 그것이 성억압의 메커니즘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든 아니든, 이른바 ‘정신적 사랑’의 대명사로 불리는 ‘낭만적 연애감정’을 즐길 수 있는 동물도 인간말고는 없다.
그러므로 미래의 성은 ‘성기적(性器的) 성’에서 ‘전신적(全身的) 성’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특히 여성은 남성보다 감각과 정서가 발달돼 있으므로, 남성이 정력에 자신이 없어 비생식적 성희를 추구하는 것과는 반대로 전신적 쾌감을 폭넓게 즐기기 위해 비생식적 성희를 추구하게 될 것 같다.
미감(美感) 역시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더 발달해 있다. 따라서 여성이 성적 주도권을 잡게 되면 ‘힘 위주의 섹스’보다는 ‘탐미적 섹스’가 우위에 서게 될 것이다. 벌써부터 그런 징후들이 보이고 있는데 요즘 우리나라 젊은 남성들이 화사하게 꾸미고 다니며 머리를 염색하고 장신구 부착하기를 좋아하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요즘 젊은 여성들은 그런 남성들을 ‘여자 같다’고 손가락질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좋아하고 사랑한다.
우락부락한 남자나 씩씩한 남자보다 화사하게 꾸미고 다니는 가냘픈 체형의 남자를 더 좋아하는 것이 바로 요즘 젊은 여성들이다. 예전에는 여성 대부분이 ‘군복을 입은 씩씩한 군인’ 이미지를 가진 남성을 선호했다. 그러나 요즘엔 그런 남성들이 별로 인기가 없다. 요즘 여성들은 그런 ‘씩씩한 남성’을 동경하고 사모하는 데 머물기보다는 아예 자기 자신이 씩씩한 여군(女軍)이 되어버린다.
이런 ‘탐미적 성’이 보편화되면 성적 오르가슴의 중요성은 점차 희석돼버린다. 그러면서 남녀 모두 관음증, 노출증, 페티시즘, 나르시시즘 등의 비생식적 성취향에 빠져들게 되고, 남성들은 한결 유순해져 공격적 심성이 아니라 평화로운 심성을 갖추게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을 ‘탐미적 평화주의’라고 부르는데, 이를테면 손톱을 길게 길러 정성껏 매니큐어한 여성은 손톱이 부러지는 게 아까워 남을 쉽사리 할퀼 수 없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프리섹스, 모계사회, 신세계
미래에 펼쳐질 ‘여성 주도의 성’을 생각해 봄에 있어, 가장 큰 궁금증으로 남는 것은 ‘출산’과 ‘육아’의 문제다. 여성들은 물론 자유의사에 따라 선택적으로 임신과 출산을 ‘결행’하겠지만, 출산의 고통과 육아의 번거로움을 감내하기는 싫어할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급진적 여성 해방운동가들은 여성들로 하여금 출산과 육아를 거부하도록 선동하고 있다.
절충적 타협안을 내놓는다면, 출산과 육아를 위한 노역을 남녀가 반분(半分)하는 것이다. 여자가 한번 임신하면 남자도 한번 임신하고 (남자의 복강 안에서도 태아를 키울 수 있다는 실험이 이루어진 바 있다), 아이를 낳았을 경우 육아 책임을 남녀가 동시에 지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남녀의 결혼’을 전제했을 때만 가능하다. 여자가 혼자 살면서 프리섹스를 즐기며 아이를 선택적으로 낳을 수 있는 것이 참된 모계사회라고 할 때, 아버지가 누군지도 확실히 모르는 상태에서 부모가 책임을 반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먼 미래를 내다보면, 이런 절충적 형태보다 완전한 ‘여성해방’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고 본다. 우선 ‘시험관 아기’가 보편화되면 여성은 임신과 출산의 노역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양육을 해결해주는 사회적 복지 장치가 개발되면 여성은 육아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사회복지시설에 의한 아이의 공동양육은 인류가 예전부터 꿈꿔왔던 유토피아 상(像)이었다. ‘모성애’ 라는 것은 그것이 잘 행동화되면 아이들에게 심리적·정서적 안정감을 가져다 주지만, 그것이 왜곡되게 행동화되면 아이들의 성격을 완전히 그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하게 잘 꾸며진 공동양육장이라 할지라도 ‘보모’를 잘못 만난 아이는 정신적 상처를 입게 된다. 따라서 이 문제 만큼은 아직은 ‘뜨거운 감자’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만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즉 숙련된 보모에 의해 키워진 아이가 곧바로 ‘어른’으로 대접받는 시대가 온다면 (다시 말해서 ‘성적 성숙’이 무시되는 ‘청소년기’나 ‘미성년자’의 개념이 사라지는 시대가 온다면), 인간은 오랜 기간 가정에서 키워질 때보다 훨씬 더 안정된 심성을 유지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 (마광수 문화비평집 <인 간>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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