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 소문내기

전라도맛_ 비자강정, 녹차설기

올소맨 2008. 3. 18. 22:12

전라도가 맛있다!

남도음식의 블루오션을 찾아라-

2. 해남 윤씨 종가의 비자강정과 녹차설기

 

 

 

전라도가 맛있다!남도음식의 블루오션을 찾아라-2. 해남 윤씨 종가의 비자강정과 녹차설기

비자·녹차 채취해 만든 강정·설기 독특한 맛

비자강정  - 특유의 쌉싸래한 맛 입안에 은은

녹차설기  - 색다른 떡 웰빙식품 경쟁력 기대

남도의 봄 정취가 물씬 풍기던 지난 9일. 광주에서 나주와 영산포를 거쳐 국도 13호선을 타고 1시간30분 남짓 달리니 '남도 답사 1번지' 가운데 한 곳인 해남이 나온다.

다시 해남읍에서 대둔사(대흥사) 방향으로 4㎞ 가량 달리다 도로 왼편으로 난 소로(小路)로 접어드니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옛 자취가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는 연동리(蓮洞里)가 나온다.

연동은 처음엔 '하연 연꽃'이 피어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백연동이라 했으나 나중에 개칭돼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또 풍수지리상으로 좌청룡 우백호(左靑龍 右白虎)의 형국을 하고 있어 최고의 명당자리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고 한다.

비자강정
녹차설기



 

 

 

 

 

 

 

 

 

 

 

 

연동리는 특히 해남윤씨가 터를 닦고 집성촌을 이뤄 520여년간 누대에 걸쳐 살아온 대표적인 동족마을로, 옛 조상의 흔적이 원형 그대로 전해 내려오면서 문화재의 '보고(寶庫)'라 불릴 만큼 전통의 모습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고산 윤선도 유적지' 표지석과 '연지'라 불리는 연못, 조선시대 문신이자 대표적 시조시인인 윤선도의 고택인 '녹우당(綠雨堂)', '어초은사당' '추원당' 등이 연동 마을을 찾는 이방인들을 다정하게 맞아준다.

미리 약속을 정하고 양해를 구해둔 터라 바로 '녹우당'으로 향했다.

(재)윤고산문화재단 이사장이자 종손인 윤형식 옹과 인사 한 뒤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다과상(茶菓床)이 나왔다. 정갈하고 깔끔한 느낌이다.

다과상의 차림새가 그 집안의 가풍이나 법도, 사회적 지위 등을 가늠하는 척도 가운데 하나였던 때도 있었다고 하니, 음식 하나하나에 담긴 정성과 노력이 오죽했으랴.

인근 3만평 규모의 녹차밭에서 직접 재배한 녹차와 함께 곶감말이, 비자강정, 녹차설기, 마람다식, 산자, 약과 등이 보기만해도 먹음직스럽다.

마을 뒷산 중록에 해남윤씨 선조들이 조성한 '비자나무 숲'에서 열리는 비자를 이용한 이 가문만의 독창적 음식인 비자강정은 비자 특유의 쌉싸래한 맛이 입안에서 은은하게 감돈다. 향과 맛이 진한 녹차도 같이 나온 음식과 잘 어울린다.

특히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녹차잎을 이용해 만든 녹차설기는 상당히 색달랐다. '웰빙' 식품으로 충분히 경쟁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수백년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감단자도 이 집안만의 독특한 맛을 지닌 음식이지만, 때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 직접 구경은 못했다.

종부인 김은수 할머니는 "집안의 전통 음식들에 대한 브랜드화나 산업화 방안에 대한 생각은 가지고 있다"면서 "상품화를 위해 음식을 좀더 화려하고 보기좋게 만들기 보다는 전통 고유의 맛을 최대한 살리면서 브랜드화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기획취재팀

“10년 배우니까 어느 정도 알겠더라고”

경상도서 시집와 말투·습관 고생해

대학 가정과를 졸업하기는 했어도

종가 음식 만드는 것은 또 달랐지…

모든 음식 만드는 법 체계화 시켜

그래야 우리 며느리가 편해지지…

#종부 김은수 할머니

종부 김은수 할머니


해남윤씨 종부(宗婦)인 김은수(69) 할머니. '의외'였다. 듣기만 해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종가의 종부. 머릿속으로만 그렸던 김 할머니에 대한 인상은 첫 만남에서부터 보기좋게 빗나갔다.

친정이 부산으로, 아직까지 경상도 특유의 사투리와 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나이에 비해 무척 젊어 보인다는 점도 놀라웠지만, 대화하는 동안 김 할머니가 보여준 거침없는 말투와 성격도 예상과는 달랐다.

"내가 원래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표현이 확실해요. 성격도 활달하고 (뭔가) 쌓이면 바로바로 풀어내고…. 할말은 다 하는 편이지."

이같은 김 할머니의 시원시원한 성격과 말투 때문에 처음엔 고생도 많았다고 한다.

"충무와 부산에서 나고 자랐는데, 그 말투와 생활 습관이 어디 가겠어요. '경상도 규수'가 전라도, 그것도 우리나라 대표적 종갓집 중 하나인 해남윤씨 집안에 시집왔으니…. 시할머니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지"하며 멋쩍게 웃는다.

김 할머니는 부산 동래여고와 수도사대(현 세종대학교) 가정과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고 있던 중 스물여섯의 나이에 물설고 낯설은 이곳 해남으로 시집왔다.

지금도 물론 마찬가지지만, 당시엔 집안의 법도 역시 옛 전통 그대로라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종갓집 종부라는 무게감 때문에 처음엔 부담이 많았었지. 설상가상으로 그동안 나고 생활해 왔던 곳과 풍속도 틀리고, 말과 음식도 달랐으니, 힘들 수 밖에…."

김 할머니는 처음 시집왔을 당시 절하는 것만 10일 넘게 배웠고, 아침 저녁으로 100일간 집안 어른들께 문안 인사를 드렸다고 했다.

그는 "그 때는 아이가 아파서 근처 병원에 갈려고 해도 집안의 어른들에게 모두 허락을 받거나 인사를 드리고 난 뒤에야 가능했다"면서 "지금 젊은 사람들은 아마 상상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집안의 내림 손맛 뿐만 아니라 집안 살림, 가풍에 대한 교육 등을 시할머니에게 배웠다. 당시 시할머니는 무척 엄하셨다고 한다.

"내가 가정과를 졸업하기는 했어도, 종가 음식 만드는 것은 또 달랐지. 만드는 음식도 생소했을 뿐더러, 음식이 맛이 없으면 다시 만들어야 했어. 시할머니와 같이 살면서 10년 정도 배우니까 어느 정도 알겠더라고."

종갓집을 찾는 손님도 끊이지 않았다. 당연히 이들을 위한 음식도 넉넉하게 준비해 둬야 했다.

현재도 평균적으로 하루 2∼3팀이 녹우당을 찾아오고 있지만 예전엔 그 수가 무척 많았다고 한다.

그는 "처음엔 무침과 볶음 요리, 육포 등으로 술상을 봤는데, 이제는 이곳 연동마을에서 재배되는 녹차와 함께 다과상을 내놓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제 '종심(從心)'을 바라보고 있는 김 할머니. 숙제가 하나 더 늘었다. 바로 종가 음식의 대를 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해남윤씨 종가 음식은 무척 까다롭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손이 많이 가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계절별로 나오는 윤씨 집안만의 독특한 음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 할머니는 비자강정과 감단자, 갓김치 등 종가 음식을 모두 매뉴얼화 했다.

"옛날엔 음식 만드는 방법이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다 보니 배우고 익히는데 무척 힘들 수 밖에…. 그래서 음식 만드는 법을 체계화 시켜놨지. 그래야 우리 며느리가 조금은 편할 것 아니냐"며 환하게 웃는다.

김지현의 명가음식 엿보기

-전라도 음식의 산업화.세계화 제언-

말차로 빚은 '녹차설기'높은 상품성

조리법 이미 표준화 브랜드 도입만 남아

처음으로 해남윤씨 종가를 찾았다. 방문 하루 전 전라도를 대표하는 종가에서 어떤 음식들을 선보일지, 또 어떤 비법이 담겨있을지 마음이 설렜다. 우리가 도착하자 단아한 느낌의 녹우당 마님께서 직접 다과상을 준비해 주셨다.

같은 음식은 전국 어디에나 있다. 이 음식을 처음으로 접해서가 아니라, 바로 내가 찾고자 했던 뼈대 있는 음식, 주인이 있고 번지수가 있는 음식, 전라도를 대표할 수 있는 음식, 정신과 혼이 담긴 음식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니 감동이 밀려왔다.

녹우당 마님의 손때가 묻은 다과상은 소박하지만 깊은 맛이 우러났고 직접 재배한 녹차는 다른 어느 곳에서 맛 본 녹차보다 향과 맛이 훌륭했다. 다과상에는 비자강정, 다식, 녹차설기, 매작과 등이 있었다. 이 음식들은 언제든지 손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늘 준비해두신다고 하셨다.

녹차설기는 직접 재배한 녹차를 가루 낸 말차로 만든 떡으로 흰떡과 녹차가루를 켜켜로 넣어 색다른 맛과 풍미,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말차를 이용해서인지 다른 차떡에 비해 색이 고왔다.

다식이나 약과에도 말차 가루를 이용하였다. 약과는 매작과의 형태로 만들었으며 다른 것은 일반 약과와 같았지만 집청꿀 위에 설탕을 묻힌 점이 특이했다. 약과를 먹을 때 집청꿀이 손에 묻어 불편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설탕을 묻히니 손에도 달라붙지 않고 접시에도 달라붙지 않고 맛도 좋아 어느 다과상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내림 음식이었다. 전통을 이어가면서 이를 현대화하기 위해 연구하는 녹우당 마님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결론적으로 비자강정은 특색은 있지만 대량생산이 어렵고 독특한 맛과 향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소비되기는 힘들다고 본다.

반면 녹차설기는 해남에서 직접 키운 녹차 잎을 이용하였으므로 보성군이 음료 녹차로서 부각 된다면 틈새시장 공략으로서 해남 윤씨 종가의 녹차의 우수성과 역사, 정통성을 부여한다면 좋은 상품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이는 이미 조리법이 표준화 되어있기 때문에 해남 윤씨의 브랜드명만 도입하면 되므로 이미 절반을 와 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또한 최근 떡의 소비가 늘고 빵의 소비가 감소하면서 다양한 떡개발이 한창이므로 시기에 적절하다고 본다.

조선시대 상류층 주택 잘 나타내

#녹우당(綠雨堂)
녹우당


'가을이면 사랑채 앞 은행나무에서 노란 잎이 마치 빗소리처럼 우수수 떨어진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녹우당(綠雨堂).

이 녹우당은 조선시대 문신(文臣)이자, 국문학상 대표적인 시조시인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와 관계가 깊은 유적지(遺蹟地) 가운데 하나다.

녹우당은 조선조 효종이 과거 스승이었던 고산을 가까이 있게 하기 위해 경기도 수원에 하사했던 것으로, 고산이 82세 되던 1669년 뱃길로 해남까지 옮겨와 다시 지은 집이다.

성호 이익의 이복형으로, 고산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의 친구인 이서가 녹우당이라는 당호(堂號)를 짓고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녹우당은 풍수지리에 따라 뒷산 덕음산을 진산(鎭山)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으로 구성돼 있으며, 그 규모와 형식이 조선시대 상류층 주택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현재 고산의 14세손이자 종손인 윤형식(尹亨植)씨가 이곳에 살고 있다.

녹우당은 지난 1968년 12월 9일 사적 제167호로 지정됐다.

잘 보호된 식물군 천연기념물 지정

#비자나무 숲


간간이 빗방울을 뿌리던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다.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녹우당 옆에 있는 300년된 해송은 언제나 처럼 말없이 그자리에 그대로 서있다.

비자나무 숲이 안개에 휩싸여 있다.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난다.

이 비자나무 숲은 해남윤씨 '어초은(연동)파' 시조인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과 연관이 깊다.

연동마을의 해남윤씨가 번성하는데 큰 기반을 쌓았던 효정이 500년전에 심은 것으로 짐작되는 이 비자나무 숲은 녹우당에서 400여m 가량 떨어져 있다.

효정은 '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가 노출되면 이 마을이 가난해 진다'고 가르쳤으며, 후손들도 그동안 비자나무 숲을 잘 보호해 왔다고 한다.

지난 1972년 7월 31일에 천연기념물 제241호로 지정됐으며, 가장 큰 나무는 높이 20m 내외로, 가슴 높이의 지름이 1m 가량 된다고 한다.

숲속에는 사느레피, 참식, 개비자, 모세, 자금우, 동백, 마삭덩굴, 남오미자, 송악 및 보리밥 나무 등의 상록활엽수종과 함께 맥문동, 소엽 맥문동 및 춘란 등이 군데군데 자라고, 주변에는 참나무류 및 서어나무류 등의 낙엽활엽수로 싸여있다.

이곳에서 나오는 비자강정은 해남윤씨 종가의 대표적 먹거리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광주의 멋진신문 무등일보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