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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앞산이 모두 바위여서 자신의 아호를 '석파(石坡)'라고 한 뒤,
정자 이름을 '석파정'으로 바꾸었다.
조선말의 우국지사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 권1에는 석파정의 내력이 적혀 있다.
삼계동에 있는 김흥근의 별장은 한성에서
가장 유명한 정원이었는데,
하루는 흥선대원군이 그 별장을 팔 것을
간청하였으나 김흥근이 듣지 않자
하루만 빌려 놀게 해달라고 하였다.
서울의 옛 풍습에 따라 정원을 가진 사람으로서
빌려주지 않을 수 없어 김흥근이 억지 승락을
하자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행차하도록 권하고
자신도 따라갔다.
그 후 국왕이 거처한 곳을 신하가 감히 거처할
수 없는 곳으로 생각하고 김흥근이 다시는
삼계동에 가지 않게 되자
결국 이 별장은 운현궁의 소유물이 되고 말았다고.
그 후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의 후손인 이희(李熹),
이준(李埈), 이우(李?)의 별장으로 세습되며 사용되어오다가
6·25 전쟁 후에는 천주교가 경영하는
코롬바고아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화강석 기단 위에 선 정면 6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의 5량가 건물로, 이곳에 서면 앞으로 멀리
인왕산과 북악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정자는 홍지동으로 이건된 '대원군별장'과 함께
조선말 유입된 청(淸)나라식 건축의 한 유형을 보여주며,
이 일대의 계곡과 소나무를 중심으로 조성된 정원은
전통적인 산수정원에 인공미(人工美)를 가미한 예를 보여준다
조선시대 전통적인 격자형 돌다리와 작은냇물을 건너 오르면 사랑채가 있다.
현재 사랑채는 석파랑 주인이 소유하고 있으며,
그 이름또한 석파랑으로 ....식당 손님을 접대하는 용도로 쓰이고있다.
사랑채 서쪽 뜰에는 잘생긴 노송(老松, 서울특별시 지정보호수
제60호, 1968. 7. 3)이 옆으로 가지를 길게 펼치며 차일 치듯
드리워져 있고, 그 뒤 언덕 위 바위에 '三溪洞'이라 새겨져 있으며,
노송이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더 들어가면 계곡 속에 정자가 있다
안채 맞은 편 언덕 위에는 망원정(望遠亭) 터가 남아 있고,
사랑채와 '三溪洞'이 새겨진 바위 사이에 위치했던 건물은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1958년 종로구 홍지동
125번지로 옮겨갔는데, 별채 문을 지나면 그 오른쪽 앞에 자리잡고 있다.
별장답게 오밀한뜰 이지만 조선시대의 안마당 정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에서흐르는 개울을 만들고
돌다리며,돌계단..등
안채 언덕 뒤에 있는 별채는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난 문을 통해 왼편으로 담을 끼고 계단을 오르다가
아래를 내려다 보면 당시의 별장의 안목높은 멋을 느낄 수있다.
과연 괴짜 대원군이 탐할 만 하다....루치니
-Pohto By Ruchine-
요즘은 상류사회의 상견례
자리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음식 값은
1人기준 6만원-12만원
주변에 상명여대가 있고
그 아래 홍지문이 있다.
주변에 음식점이 많이 있어
꼭 저집 맛을 볼 필요는 없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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