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영화·공연

'최종병기 활' 이란 영화를 보고

올소맨 2011. 8. 25. 21:01

 

 

 

"최종병기 활"이란 영화를 보고서 그 동안 한국영화가 취약했던 스토리부분에서 많은 발전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병자호란은 1936년 12월에 청나라 홍타이지가 압록강을 넘어 10만대군 이끌고 들어와 남한산성에서 조선의 인조대왕이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의 뜻으로 굴욕적으로 무릎끌고 절하였고 이듬해 1월까지 50만 조선인을 포로로 데리고간 사건이다. 병자호란 사건을 각색하여 다른 "최종병기 활"이란 영화는 왕도 조선의 백성을 포기한 상태에서 역적의 자손 남이(박해일)가 청나라 장수 쥬신타(류승룡)을 상대로 활로 싸우는 장면을 담고 있다. 주인공 남일이 아버지의 유언대로 여동생 자인(문채원)을 끝까지 지키는 장면도 박진감 있고 스릴있게 잘 만들어져 있다. 
또한 쥬신타와 남이의 대결도 9208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桓國)인의 사나이다운 기풍과 의리 등을 엿볼수가 있다. 총가지고 대결하는 서부영화의 낭만적인 스릴보다 더 박진감 있게 활을 가지고 싸우는 모습을 그려낸것 같다. 서부영화에서는 넓은 사막을 스크린에 가득채웠다면 "최종병기 활"은 넓은 초원지대를 스크린에 가득담아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남이가 여동생 자인을 구하기 위하여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에 들어가 임시 정착중인 청나라 왕자를 볼모로 잡고 청군의 기에 눌려 의욕을 상실한 조선인들의 가슴에 불을 댕겨 청군을 죽이고 되돌아 오는 모습은 작가와 김한민감독의 노련한 끼를 엿볼 수 있었다. 
"최종병기 활"이란 영화는 많은 제작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한국영화도 서부영화 못지않게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한국에 영화를 제작하는 많은 한국영화 작가와 감독들의 활동을 기대하며 "최종병기 활"보다 더 뛰어난 영화가 계속 제작되길 바란다. 
 
"최종병기 활"의 영화의 소재인 "병자호란"를 아래에 소개한다.  

1. 정의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

2. 이칭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난 오랑캐의 침입이었다는 의미에서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도 한다.

3. 배경

1627년(인조 5) 후금(後金)의 1차 침입 때 조선은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이때 조선은 후금의 요구에 따라 1628년 이후 중강(中江)·회령(會寧)에서 무역과 후금에 대한 예폐(禮幣 :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를 실시한 바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점차 과도한 식량이나 병선(兵船) 등을 요구하고 때로는 변경 민가를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더욱이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할 것과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등을 요구해오자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후금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의 목소리가 높았다. 이런 가운데 용골대(龍骨大)·마부태(�p熙�) 등이 1636년 2월에 후금 태종(太宗)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 비 한씨(韓氏)의 문상차 조선에 와서 후금에 대한 군신의 의를 들먹였다. 이에 인조가 사신접견을 거절하고 국서(國書)를 받지 않자, 조선의 동정이 심상치 않음을 안 이들은 도주과정에서 공교롭게 조선조정이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갔다. 이 과정에서 후금은 조선의 후금에 대한 입장을 파악하였고, 결국 재차 침입에 나설 빌미를 제공받은 셈이었다. 같은해 4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하였고, 태종은 관온인성황제(貫溫仁聖皇帝)의 칭호를 받았다. 청 태종은 이 자리에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해왔다. 청의 이같은 요구는 결국 조선 내 척화분위기를 강화시켰고, 조선 조정은 그해 11월 조선의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자들을 압송하라는 청의 통첩을 묵살하여 강경책으로 맞섰다.

4. 경과

청 태종은 1636년 12월 대군을 이끌고 조선침입을 감행하였다. 청군은 심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압록강에 이르렀고, 14일에 이미 개성을 지나는 등 매우 빠른 속도로 내려왔다. 이에 인조는 우선 세자빈 강씨(�x�), 원손(元孫), 그리고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 등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자신도 강화도로 향하려 하였다. 그러나 청군이 이미 영서역(迎曙驛 : 지금의 서울 은평구 대조동과 불광동 사이)을 통과하고, 다른 부대는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하여 강화도로 가는 모든 길이 막히자,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몽진하였다. 인조는 우선 성 안에 있는 군사 1만 3,000명으로 성을 지키도록 하고, 도원수·부원수와 각도의 관찰사와 병사에게는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다. 거칠 것이 없었던 청군의 선봉부대는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청 태종은 다음해 1월 남한산성 밑 탄천(炭川 : 지금의 성남시를 종단하는 하천)에서 20만의 군사를 포진시켰다. 이러한 대치상태는 40여일간 지속되었고, 남한산성을 향한 지방 각 도의 관군들은 청군에게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였다. 이렇듯 남한산성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로 빠졌고, 더욱이 성 안의 식량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으며 외부적인 형세마저 더욱 불리해져만 갔다. 원군을 청한 명나라는 당시 유적(流賊)문제로 원병을 보낼 만한 처지가 아니었고, 등주총병(登州總兵) 진홍범(陳弘範)이 이끌던 수군도 거친 기상조건 때문에 출발할 수 없었다. 이 밖에 경기·전라·경상도 등지의 의병과 의승군(義僧軍)도 봉기하였으나 실제 전투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5. 결과

안팍의 어려움에 처하면서 차차 강화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주화파(主和派)와 주전파(主戰派)의 거듭된 논쟁은 결국 강화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1637년 1월 좌의정 홍서봉(洪瑞鳳),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 등을 보내어 화의를 청하자, 청 태종은 국왕이 친히 항복하고 척화 주모자를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이 불응하고 주저하는 와중에 강화도가 함락되어, 숙의(淑儀)와 빈궁과 봉림·인평 두 대군 및 대군의 부인 등이 포로로 잡혔다. 강화도 함락사실에 인조는 결국 출성을 결정하고 조약에 합의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조선은 청에 신하의 예를 행할 것. 둘째, 명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바치고 명과의 관계를 끊으며, 명의 연호를 버릴 것. 셋째,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보낼 것. 넷째,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조선은 원군을 파견할 것. 다섯째, 가도(·島)를 공취할 때 조선은 배 50척을 보낼 것. 여섯째, 성절(聖節)·상삭(上朔)·동지(冬至)·중궁천추(中宮千秋)·태자천추·경(慶)·조(弔) 사신의 파견은 명의 구례(舊例)를 따를 것. 일곱째, 압록강을 건너간 뒤에 피로인 중에서 도망자는 전송할 것. 여덟째, 내외제신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아홉째, 조선은 신구(新舊) 성원(城垣)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열번째, 올량합인(兀良合人)은 마땅히 쇄환할 것. 열한번째, 기묘년(1639)부터 세폐를 보낼 것 등이었다. 결국 인조는 세자와 함께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성하(城下)의 맹(盟)을 행한 뒤 서울로 돌아왔고, 청은 조선의 세자·빈궁·봉림대군을 볼모로 삼고 척화를 주장한 대신들을 잡아 심양으로 돌아갔다.

6. 전후관계

전란 이후 조선과 청의 종번관계(宗藩關係)는 점차 강화되었다. 조선은 화의교섭에 따라 명과 국교를 단절하고 청조로부터 '조선국왕'으로 책봉받아 군신관계를 재확인하였고, 청은 삼전도(三田渡)에 청 태종의 공덕과 승전을 기념하는 비를 세울 것을 요구하였다. 한편 강화조약의 기본원칙인 청의 연호사용을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인조는 공사문서에 청나라 연호인 숭덕(崇德)을 사용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개인문서나 제향(祭享)의 축사(祝詞)에는 의례 명의 연호가 사용되는 등 청에 대한 배척의식은 점차 고조되어 갔다. 이후 청은 여러 차례 조선군의 출병을 요구하였고, 이에 조선은 파병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청과 맺은 강화조약에 따라 군대를 파병할 수밖에 없었다. 명과의 전쟁에 청군과 함께 참전한 조선군이 가급적 관망의 자세를 취했고, 때로는 척후선을 이용하여 청군의 동태를 명의 진영에 보고하는가 하면 조선의 파병이 어쩔 수 없었음을 알렸다. 이러한 조선군의 반청(反淸)행위에 대해 청 태종은 강화조약의 불이행을 엄중히 항의하기도 하고 여러 차례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는 등 조선군의 협력으로 명을 치고자 하였으나, 청의 의도는 실효를 거둘 수 없었고 오히려 국내의 반청의식만 조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전후에 대두된 심각한 문제는 청군에게 강제로 납치된 백성들의 속환문제였다. 청군에게 잡혀간 민간인은 속가(贖價)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민들이 많았다. 또한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문제가 정치·사회 문제로 대두되는 등 병자호란은 이후 조선사회 안팎으로 큰 파장을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