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절망 속에서 핀다
시골출신인 내가 서울특별시민이 된지 어언 30년이 지났다.
삶에 지쳐 아등바등 사느라 그 세월을 어떻게 엮어왔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다만 큰 병들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이 고마울 따름이다. 인생말년에 결산해보면 재산이나 명예와 권력 그리고 학력 등이 결국 평균치라던 어느 선배의 말이 요즘 들어 실감이 난다.
그런데 국부가 커지고 글로벌기업들이 등장하여 국가경제규모가 세계 12위라는데, 어째서 우리 국민은 살기가 더 팍팍해질까. 지구촌시대의 영향일까, 디지털 시대의 부산물인가. 아니면 자원빈국의 숙명일까. 살인적인 생필품가격과 유류가격의 인상, 전세대란으로 치닫는 주택문제, 340만 마리의 소와 돼지를 묻은 구제역 대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우리는 현실에 지치고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불안해한다. 이유는 뭘까. 어째서 OECD가입국 중에서 자살자와 이혼율, 교통사고가 1위란 말인가. 왜 2년 내지 4년간 대학공부를 마친 364만명의 젊은이들 중 태반이 일자리가 없어서 허드렛일로 세월을 축내야 하는가. 그보다도 ‘사람이 최고’인 나라에서 점점 사람의 가치가 떨어지는 이유는 뭘까.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개인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사회구조적인 문제일까. 아니면 지도자의 리더십 내지 정부의 정책 부재 때문일까.
이런 판국에 대학교수라는 사람들이 제자들을 성희롱하고 개인적인 목적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국회의원들은 연봉 1억6천만원(세비와 수당 포함. 일당 40만원 꼴)을 받으면서도 서민들의 아픔과 국가의 미래를 외면하고 있다. 국민을 외면한 권력이 당하는 처절한 역사의 보복을 남의 일로만 치부하는 못난이들이 지도층 행세를 하니 참 딱하다. 국민은 하나같이 똑똑한데 어째서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은 국민에게 우습게 보이는 걸까.
국민의 경제소득이 높아가고 학력이 높아가고 사람들의 교양과 상식과 문화수준이 높아가는 데, 사회는 점차 사람이 숨 쉬고 살 수 없는 범죄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우리가 만들고자 했던 나라가 고작 이것이었던가?
엊그제도 젊은이가 염세 비관하여 죽음을 택했다는 보도가 있었고, 심지어 고위 공직자라는 사람이 돈 때문에 모친을 살해하는 끔찍한 일도 벌어졌다. 이제는 중학생들까지 범죄에 가세하여 저보다 어린 초등학생들을 납치하여 인신매매하기도 한다. 이러한 일들은 지난날 동북아를 호령하던 기개 있는 민족이요 선비의 나라, 광명의 땅으로 존중받던 대한민족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필자는 60대 중반의 할아버지이다. 광복 직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6.25의 전란을 겪으며 간난신고 하며 살아왔다. 너무 힘들게 살아온 탓에 노후 준비를 할 겨를이 없어서 지금도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며 산다. 돌이켜보면 억울한 일이야 셀 수 없지만 과거를 탓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다급하다. 괴로워 술을 마시거나 남과 다툴 시간도 없는 것이 내 운명 같다.
이러한 현상이 어찌 필자만의 것이랴. 이른 새벽 지방으로 강의를 하러 길을 나서다 보면 새벽의 문을 여는 사람들은 대개 50대 후반 이후의 사람들이다. 지하철과 시내버스에서 만나는 그들은 거의 비정규직으로 경비원이나 청소원, 식당일 또는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이다. 어둠을 뚫고 일터로 향하는 그들의 굽은 어깨를 보노라면 조금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분들이 있기에 새벽은 더 싱그럽다.
필자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삶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가뜩이나 정신없이 돌아쳐야 살 수 있는 직장인, 팍팍한 생활에 지친 가정주부, 젊은 나이에 바뀐 환경 속에서 힘들어하는 군인들, 정처없는 경쟁의 와중에 내던져진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인생을 값있게 살 것인가를 말해준다. 인생을 달관한 현자도 아니련만 지난 세월이- 아니 세월의 앙금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좋게 말하면 강사지만 나 스스로는 그냥 이야기꾼(Story Teller)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어느 날 갑자기 직장에서 밀려난 지 어언 20년이 된다. 40대 중반의 한창 일할 나이였는데, 정권이 바뀌면서 아무 이유 없이 해직 당했을 때는 그만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 때만큼 나의 무기력을 절감한 때도 없었다. 약 한달 간을 고민하던 끝에 얻은 결론은 ‘내가 쓰러지면 슬퍼할 사람은 단 10명도 안될 것이다’, ‘고생만 하고 살아온 아내가 아이들을 어찌 건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분연이 일어섰다. 이제는 고난 극복의 내공이 쌓여 남을 원망하기보다 역경을 안겨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안고 산다. 인생의 초반부터 중반까지 연속된 고난과 역경이 나를 야전형으로 강하게 키워줬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 인간이 만든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이 풀 수 있는 방법은 그 문제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 우리사회가 당면한 수많은 난제 역시 누가 강제로 안겨준 것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다. 하여 그 안에 반드시 숙제를 풀 열쇠가 있다. 그것을 모르고 외국사례만 분석하는 태도 때문에 아까운 돈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다.
지금 처한 상대적 가난과 질병과 범죄는 소득수준의 증가와는 무관하게 인간을 괴롭히는 본질적인 병이다. 이 병을 잘 치유해나가는 국가가 선진국이 된다. 미래의 선진국은 지금 서구의 모습이 아니다.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새로운 선진국 모델을 우리가 만들어내야 한다. 그 역사적인 소명을 다하려고 하늘과 땅이 우리에게 시련을 안겨주었다. 모름지기 이러한 소명을 해결할 민족이 바로 한민족이라는 것을 하늘과 땅은 알고 있는 것이다.
난 커피나 콜라보다는 차를 좋아한다. 그런데 그 차나무는 하루아침에 자란 것이 아니다. 중국의 운남성에는 2천년이 된 차나무도 있다고 한다. 차나무가 역사가 된 것이다. 또 차 잎을 땄다고 해서 생(生)으로는 못 먹기 때문에 열을 가하여 그 독기(毒氣)를 빼준다. 이를 ‘덖는다’고 한다. 완성된 차는 보기에는 시커멓고 보잘 것 없지만 찻잔에 넣고 적당히 데워진 물을 부으면 차 잎이 파랗게 살아나고, 마시고 나면 입안이 개운하고 정신을 맑게 해준다.
사람이 지금 당장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좌절한다면 큰 나무가 되지 못한다. 마음이 쓰릴 때면 쓴 차를 마셔야 한다. 쓴 맛이야말로 인생의 참맛이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말처럼 우리네 삶에 가해지는 고통이라는 쓴 맛은 나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희망의 에너지이다. 아니 미래를 안내해주는 확실한 빛이다. 빛을 마다하고 어둠을 선택하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지금 나에게 다가온 시련에 고마워하자. 그리고 이를 악물기보다는 웃으며 하루를 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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