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순진한 여자를 좋아해? 자극적인 여자를 좋아해?" 연애 기사를 줄곧 써왔다는 이유로 받게 되는 난감한 질문. 이렇게 말하고 싶다. 백김치와 고춧가루 팍팍 묻힌 배추김치 중 뭐가 더 좋으냐고. 결국 맛만 있으면 된다. 여자도 그렇다.
“그 여자는 자극적이야.” 그는 소개받은 친구 L과 섹스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귀는 건 그다음이다. 묘하게 섹시하다. 여자에 대한 남자의 반응은 그랬다. 소개팅의 주선자로서 나는 그의 반응이 당혹스러웠다.
내 친구 L에 대해 설명하자면 한마디로 참한 아가씨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그날도 그녀는 목까지 올라오는 블랙 터틀넥에 카디건을 단정하게 걸치고 앉아 있었다. 둘은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았고, 그녀는 그가 물어보는 일상적인 질문에만 대답한 모양이다. “그래서 말인데, 갑자기 밀어붙이면 못 이기는 척 그녀도 받아들이지 않을까?” “글쎄, 아마 오빠는 인간 취급도 못 받을걸….” 그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L은 애인이 없다면 섹스 없이 평생을 살고도 남을 그런 여자다. 진지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3개월 이상의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믿는. 섹스는 그다음 문제다. 적어도 10년 동안 지켜본 결과에 따르면 그렇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남자를 흥분시킨 건 L의 그 순진함이었다.
일탈이 허용될 것 같지 않은 보수적이고 엄격한 여자에 대한 환상. 이 여자와 섹스하면 어떤 느낌일까? 뭔가 특별한 남자가 되는 그런 기분. 서른이 넘을 때까지 성실하게 박사 과정을 밟고 연구원으로 대기업에 입사한, 그러나 여자 관계만은 다소 복잡한 모범생에게 L은 어쩐지 공부하고 싶게 만드는 새 노트와도 같았다. 여자들은 모른다. 가슴 깊이 파인 옷차림으로 섹시하게 허리를 흔드는 미나보다 ‘어머나’를 외치는 원더걸스가 더 자극적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건 다만 야한 여자와 순진한 여자에 대한 기호의 차이가 아니라 호기심의 문제라는 걸.
그래서 그녀들은 무턱대고 섹시하다는 스모키 메이크업을 연습하고, 잡지에 나오는 ‘남자를 유혹하는 섹시한 행동 54가지’ 따위를 암기한다. 그렇다보니 몇 번 만난 남자의 허벅지를 더듬다 차에서 쫓겨나는 비극적인 사태도 벌어지곤 한다. 이건 실제 상황이다. 남자는 저돌적인 그녀의 섹스어필에 겁이 났다고 했다.
서너 번의 만남에도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자 조급해진 여자가 차 안에서 남자의 허벅지를 더듬다 키스를 했고, 무릎 위에도 올라앉았다. 그러자 그가 그녀를 밀쳐냈다. 그가 순진한 편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지금껏 마음과 몸이든 몸만이든 정을 나눈 섹스 파트너의 숫자만 해도 바람둥이 쪽에 가깝다. 다만, 그는 짐승이 아니었을 뿐이다.
모든 남자가 마찬가지다. 노골적인 건 부담스럽다. 상투적인 건 재미가 없다. 상체를 숙일 때마다 드러나는 V라인의 가슴이나 아슬아슬한 짧은 치마, 혹은 젖은 머리 따위가 자극적일 수는 있으나 그런 상투적인 섹시함은 ‘그래, 좀 야하군. 춥겠는데?’ 정도의 감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달라붙은 티셔츠의 브래지어 자국만 봐도 발기한다는 중학생이라면 모를까,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결국 상상력이다. 어떤 여자가 자극적으로 느껴지는가, 아닌가는 상대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상상의 여지를 주느냐에 달렸다. 노골적이지도, 상투적이지도 않은 새로운 스타일의 어떤 것.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없다면 당연히 더 만나볼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이 자극의 종류는 남자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친구로 지낸 Y군은 단 한 번도 남자친구를 사귄 적이 없다는 여자의 고백과, 그 고백을 진심으로 믿을 수밖에 없게 하는 촌스러운 그녀의 옷차림과, 평범한 외모에 자극받은 경우다. 보수적이면서 유약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끝내 마초를 지향하던 대한민국 평균 남성 Y는 “술도 못 먹고 담배도 안 피워. 이런 여자는 처음이야.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둘은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성격 차이로 헤어졌으나,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 좀 놀아본 Y와 달리 진실로 순박하기만 한 대학원생 후배는 외로운 대전 생활에 위안이 되어준 위스키 바의 바텐더에게 빠졌다. 친절하게 먼저 이야기를 건네고 연락처 적은 쪽지를 손에 쥐여주는 순간, 그래서 자기와 함께 따로 밖에서 만나 돈가스를 먹고 먼저 손도 잡아주는 그녀에게 이 시골 총각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직업상 친절한 그녀가 밖에서 따로 만나 손을 잡은 손님의 수는 그녀의 매상과 비례했지만, 이 순박남에겐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Y 역시 이 바텐더와 심심풀이 삼아 데이트를 했다. 물론 적당히 때가 묻은 Y에게 바텐더는 예쁘장한 직업여성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진실로 순박한 스물여섯 총각은 거기서 멈출 수 없었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여자와의 데이트가 그를 자극한 것이다. 지독한 첫사랑의 열병으로 그의 안타까운 데이트는 끝이 났다. 이런 경우도 있다. 한 여자와 6년 넘게 섹스 파트너 관계를 유지했다는 선배 K는 그렇게 오랜 시간 그녀와 섹스를 해왔음에도 사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고 한다. 단 한순간조차. 그녀의 첫 남자가 본인이었음에도 어쩔 수 없더라는 것이다.
예술적인 감성의 그에게 지나치게 평범한 그녀는 편안한 섹스 파트너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했다. 그는 6년간의 섹스 파트너와 별개로 침대 위에서 러셀 바노이의 ‘성욕 없는 섹스’ 를 논할 수 있는 여자와 연애를 하곤 했다. 그는 페니스를 잡아 단단하게 만드는 섹스 파트너의 손보다 여자친구의 지적인 입술에 흥분한 것이다. 그리고 그 가련한 섹스 파트너는 K의 선배와 결혼했다. K의 선배는 착하고 소탈한 그녀의 성격을 자극적이라고 느꼈다. 물론 그녀와 K의 관계는 지금까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건 취향에 대한 이야기다.
평범함 그 이상도 이하도 오간 적 없던 나에 관한 그들의 주관적 평가는 일단 무시하기로 하자. 중요한 건 어떤 이유에서든 언제나 새로운 것은 자극적이지만 그게 본인의 입맛에 맞느냐는 또 다른 문제라는 사실이다. 다시 한 번, 이건 취향의 문제다. 지금도 그들은 또 새로운 어떤 여자에게 열광하고 있을 것이다. 그 대상은 ‘원더걸스’의 소희일 수도, 완벽한 김태희일 수도, 옆 부서의 능력 있는 여상사일 수도 있다. 혹은 그 모두이거나. 다시 순진한 여자와 자극적인 여자 이야기로 돌아가자. 좋아하는 남자의 마음을 몰라 고민하는 여자가 묻는다. 그래서 남자는 둘 중 어떤 스타일에 더 끌리는 것 같으냐고. 상반된 두 스타일의 대표적 예로 <어린 신부>의 문근영과 <원초적 본능>의 샤론 스톤은 어떤가? 좀 묵은 스타이긴하나 그럴듯하다. 물론 남자들이 어느 한쪽에 더 의미를 둘 것이라는 건 그야말로 순진한 여자들의 바람이다. 그들은 둘 다 사랑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때 묻지 않은 당돌한 소녀가 주는 풋풋함도, 뇌쇄적인 눈빛으로 노팬티를 강조하는 완숙한 여자의 유혹도 팍팍한 사회생활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색다른 자극이니까.
매력적인 여자로 어필하기 위해 전형적인 두 여자의 이미지 사이에서 고민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상대를 조사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왔고, 어떠한 라이프스타일로 생활해온 남자인지. 하다못해 대선에서 누구를 뽑을지만 물어봐도 대략적인 인생관이 나온다. 그 정도의 수고는 해볼 만하지 않은가.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24시간 순진하거나 자극적인 여자는 없다. 그건 그들도 안다. 다만 그들에겐 자신의 상상력을 가동할 버튼이 필요할 뿐. 분명 당신 안의 어디엔가 그 매력의 원천이 존재할 것이다. 상대를 알았으면 버튼을 눌러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면 그만이다. 쉽지 않은가? 여자가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경우도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단정한 피케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탄탄한 가슴이 울룩불룩한 근육을 자랑하는 보디빌더의 상반신 누드보다 남자답게 느껴지는 것처럼. 노골적으로 입술을 들이미는 쉬운 남자보다 소심한 척 내숭을 떨다 상기된 얼굴로 비밀스럽게 자기만의 섹스 판타지를 털어놓는 쪽이 훨씬 섹시하듯. 감각 있는 개인 명함이 명품으로 치장한 옷차림보다 멋스럽게 다가오는 식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내 입맛의 어떤 것, 그것이 관건이다.
다만, 여자와 남자가 다른 점이 있다면 여자들은 늘 맛보던 스타일을 고수하는 대신,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평생을 소년으로 머물기를 희망하는 남자들은 익숙한 것이 주는 안정보다 새로운 것이 주는 자극에 더 열광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일단 버튼만 누르면 그 호기심 너머에 존재하는 실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사랑에 빠진 순간만큼은. 순진한 L을 섹시하다고 느낀 그 남자는 절대 틈을 주지 않는 그녀에게 몇 주째 문자만 날리고 있다. 안타깝게도 남자가 아닌 귀신을 홀리는 색기라고 판명받은 나는 올 연말도 총각 귀신들과 함께해야 할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단 하나의 매력 포인트를 누설하겠으니, 그건 순진함도 자극적임도 아닌, ‘매너’라는 평범한 진실. 백김치도, 새빨간 배추김치도 어쨌든 장독을 벗어나 먹기 좋게 그릇에 담겨야 손이 가는 법. 매너 있는 자세로 그 남자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한다면, 총각이든 귀신이든 홀리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나. L도 나도 당신도, 새해엔 사랑 한번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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