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좋은글

봉숭아

올소맨 2008. 3. 12. 11:53

봉숭아 / 도종환

우리가 저문 여름 뜨락에 엷은 꽃잎으로 만났다가
네가 내 살속에 내가 네 꽃잎속에 서로 붉게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열에 열 손가락 핏물이 들어 네가 만지고 간 가슴마다
열에 열 손가락 핏물 자국이 박혀 사랑아, 너는 이리 오래 지워지지 않는 것이냐
그리움도 손끝마다 핏물이 배어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


7월도 막바지 한 여름이 기다리고 있는데, 학교 화단에 핀 봉숭아를 보는 순간 위 시인의 시가 생각이 났다. 물론 봉숭아의 꽃색이 하얀, 진분홍...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붉은 색이 대표일 것 같고, 봉숭아 꽃 밭 위로는 빠알간 잠자리 떼가 날았던 것 같다. 그리곤 빠알간 고추를 말리던 초가지붕과 덕석이 마당을 차지했던 추억이 생각난다.
옆집 소녀는 손톱마다 짚을 말아서 무엇인가를 붙이고 다녔고 첫눈이 올 때까지 봉숭아 물이 사라지지 않으면 첫 사랑이 이루어 진다는 전설을 말했던 것 같다. 곧 동네 어귀 추자나무의 추자가 익어가면 옆집소녀는 봉숭아 물보다도 추자를 까다가 손톱의 봉숭아 물이 바랬던 것을 지켜보았던 적이 있었다.
세월은 흘렸고, 소녀는 떠났고, 아린 상처로만 남아있는 추억만 주변을 맴돈다. 오늘 따라 봉숭아 꽃 색이 너무 진하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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